내가 쓴 글/빚쟁이

빚쟁이 (2)

세발너구리 2023. 12. 4.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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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이! 늦는 다더니!"

오랜만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이다. 가운데가 변호사다. 그 옆에 친구는 대기업 회사원, 반대쪽 옆의 친구는 학원 강사다. 우리는 왁자지껄한 장소로 이동했다.

 

"요즘 뭐 하고 지내?"

"아들 크는 거 보는 재미로 살지? 너는?"

"난 그냥 그렇게 산다. 얼마 전에 카메라 하나 사서 재미있게 가지고 놀고 있지."

"사진 찍는 게 무슨 재미냐? 요즘에 핸드폰이 얼마나 좋은데? 완전 DSLR급이라니까?

"뭔 소리야.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너 핸드폰 뭐 써? 야! 무슨 출애굽기 시대의 유물을 들고 다니냐? 박물관 가져가게? 이거 봐."

"오! 이거 정말 비싸던데. 어떻게 샀어?"

"우리에게는 통신사가 있잖냐."

"그거 완전 바가지야. 따지고 보면 오히려 손해야!"

"내일 나갈 돈을 오늘 걱정하지 마라. 오늘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중요하다."

 

누가 누구한테 묻고 답하는 건지 모르겠다. 마치 익명성이 보장된 대화를 하는 것과 같은 기분으로 서로의 생각이 자유롭게 교차한다. 서로 하는 일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친구는 친구다. 같이 있으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소음과 같은 서로의 생각들이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왜곡하고 있었다.

 

얼마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서서히 회비가 모자랄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할 즈음이다.

"나 다음 달에 외국으로 나가. 1년 동안 미국으로."

갑작스러운 변호사의 선포에 정적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서 보내주는 거야? 너 파트너 되기 전에도 한번 다녀오지 않았었나?"

"응. 최근에 미국 로펌하고 사업 관련해서 얘기가 오가고 있거든. 그것 때문에서 회사에서 몇 명 추려서 미국에 잠시 보내기로 했는데, 나도 운 좋게 포함됐네."

"오! 이번에 다녀오면 회사에서 중역으로 완전히 자리 굳히는 거냐?"

“완전 최고네! 너 한국에 다시 돌아올 때면 이제 우리와는 급이 달리지는 거 아니냐?"

다른 친구들은 변호사에게 정신없이 무언가를 묻는다.

 

◤  꽤 오래전 변호사와 함께 사법시험을 보기 위해 같은 시험장에 가던 날이 생각난다. 서로 이번에는 꼭 합격하자고 다짐하면서 시험장으로 들어갔었다. 몇 개월 뒤 변호사는 2차 시험 준비를 위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그저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때 멍하게 보낸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깝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다. 현재와 미래 따위는 걱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마음이 아픈 것 같은데 아프지 않았다. 눈물이 날 것도 같은데 나오지 않았다. 그냥 가슴이 먹먹했다가 코가 시큰했다가 그랬다.   

 

"와! 대단한데?"

학원 강사의 유난을 떠는 목소리에 생각의 흐름이 끊겼다.

"결국 월급쟁이를 벗어나 빌어먹을 자본가가 되는 거냐? 내 친구가 자본가가 되다니...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겠다."

친구들의 가볍고도 짓궂은 농담에 변호사도 웃으며 맞장구친다. 그리고 내 마음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무겁다.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나보다 한 발씩 앞서간다. 한 걸음씩 나던 차이가 이제는 날아서도 쫓아갈 수 없는 거리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이제는 쫓아갈 의지도 없다. 이미 내 날개는 꺾여 버린 지 오래다.

 

  또다시 사법시험 1차에 실패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의 20대는 끝나 있었다.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할까 몇 날 며칠을 고민했었다. 하지만 내가 결정할 수는 없었다.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시 시험을 준비하면 안될 것 같았다. 이제 시험을 준비하고 시험장을 가는 것은 마치 관성과 같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대신 결정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불러봤다. 이제 시험 그만둘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엄마는 잘 생각했다고 결정해 줬다. 수화기 너머로 애당초 되지 않을 시험에 몇 년을 허비한 것이냐는 아버지의 꾸중이 들려왔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앞날에 대한 결정이었지만, 나를 지탱하던 마지막 기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 꿈... 내 열정... 내 날개... 더 이상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야! 뭐 해? 건배하자니까!"

"아... 미안. 뭐 좀 생각하느라고."

회사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매일같이 업무에 치여 사는 대기업 회사원 보다, 밤에 일이 더 많은 학원 강사 보다... 나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변호사 보다 내가 더 바쁠 수는 없다.

 

어느덧 자리를 파할 때가 되었다. 서로 가정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모두들 배우자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자식들에게 물려줄 유전자에는 '실패'라는 두 글자가 너무 깊이 각인되어 있다.

 

돌아가는 길에는 약간의 취기가 함께한다. 취기는 나를 툭툭 치면서 자꾸 한쪽으로 몸을 쏠리게 한다. 양쪽의 균형을 잡기 위해 밀리는 쪽의 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반대쪽 손은 주머니에 넣어 둔다. 갑자기 손 끝에 닿아 있던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 진동이 느껴진다.

'우리끼리 한잔 더 하자'

변호사다. 괜히 피하고 싶다. 망할 놈의 취기가 나를 반대쪽으로 밀어냈으면 짧은 휴대전화의 진동을 느끼지 못했을 텐데...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 곧 출국한다는 친구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다.

'어디로 갈까?'

'장소 옮기자. 신림동으로. 예전에 자주 가던 곳에 가자. 지하철역에서 보자구'

새삼스럽게 자신의 성공을 뒤돌아보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옛 맛이 그리워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나를 괴롭히기 위한 것일까? 왜 하고 많은 곳에서 하필이면 신림동일까.

'그래'

하지만, 내 손가락은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답변을 보낸다.

 


 

신림동. 고시생들의 메카. 수많은 용들이 태어난 곳. 그리고 그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버려진 곳. 그곳 어딘가에 꺾이고 버려진 나의 날개가 있을 것이다.

"정말 오랜만이다."

변호사는 감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하던 날 변호사는 나에게 말했었다. 이제 그만 자기 인생을 다룬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누구도 의심을 갖지 않는 행복한 삶만이 상상에서 가공될 뿐 더 이상의 이야기 전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다. 지금껏 고생만 했고, 앞날이 창창한 사람한테서 들을만한 얘기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가 된다. 지금까지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변호사는 그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가 더 힘들 것이고, 그런 힘든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옛 생각난다. 그때는 우리 둘 다 젊었었는데."

"아직도 젊어."

"하하! 그렇지. 아직도 우리는 젊지!"

많은 변화가 생긴 골목이지만 우리는 익숙한 길을 다니듯이 옛 단골집을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이게 누구야! 우리 변호사님 아니야?"

"안녕하세요."

"어! 그래! 같이 왔구먼. 이게 얼마만이야?"

변호사를 기억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나를 기억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몇십 년 단골손님처럼 나를 맞아 주시는 오랜 술집의 할머니가 싫지는 않았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주로 신림동에서 고시를 준비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변호사의 얼굴에 나타나는 웃음에 장단을 맞춰주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울적한 기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기억나냐? 둘 다 3번째 1차 떨어지고 나서, 술 마신 후에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다녔잖아."

"그랬지. 마치 세상 끝난 것 같이 정신줄 놓고 다녔지."

"너 인마, 산에 올라가서 목 매단다는 거 말리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냐?"

"미친! 넌 쥐약 먹고 자살한다고 해서, 한 밤 중에 쥐약 산다고 놀아 다녔잖아!"

"같이 돌아다닌 주제에 무슨... 하하!"

 

둘 다 똑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즐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즐거움도 시간적인 제약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갑자기 변호사의 휴대전화가 울린 것이다. 집인 것 같다.

"나 아직 친구 만나고 있는데... 어... 아니야. 다들 들어가고, 예전이 같이 고시 준비하던 친구랑 둘이서 마시고 있어. 신림동에서. 왜 있잖아. 펌에 다니다가 신용평가회사 다닌다는 친구."

잠시 짧은 정적이 흘렀다. 변호사 아내의 목소리가 드문 드문 들리는 것 같다. 변호사의 표정이 살짝 경직됐다.

"알았어. 일찍 들어갈게."

통화는 급하게 마무리되었고 살짝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통화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지만은 않았었나 보다. 분위기 반전이 필요했다.

"전화기 좋네. 잠깐 구경 좀 하자."

"응. 여기. 난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올게."

 

변호사자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난 휴대전화를 만지작 거린다.

'참..  컴퓨터 한 대 값인데... 이제는 2년에 한 번씩 바꾸네."

나이를 먹기는 먹었다 보다. 새로운 물건을 만지면서 옛날 생각을 한다.

전화기를 변호사 쪽 자리에 옮겨 놓으려는 순간, 갑자기 화면이 밝아지면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아무런 보안설정이 되어 있지 않은 휴대전화 화면에 적나라하게 문자내용이 적혀있다.

'내가 사회생활에 도움 되는 사람들 만나라고 했지? 이제는 당신이 만나야 되는 사람들의 급이 달라진다고 몇 번을 말해. 도움 될 만한 사람들 좀 만나고 다녀. 돈 받으러 다니는 이상한 사람 만나지 말고. 빨리 들어와. 애들 기다리니까.'

심장에 칼이 꽂히면 이런 기분일까? 뭔가 훅 들어온 느낌인데 통증이 없다. 단지 가슴 한가운데가 싸늘할 뿐이다. 마치 훔친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듯이 휴대전화를 살며시 놓았다. 피해는 내가 입었는데 내가 죄를 진 것 같이 행동한다.

 

변호사가 돌아와서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우리 이제 그만 들어갈까? 요즘에 애들이 아빠가 안 오면 잠을 안 자서."

"응. 그래. 나도 내일 오전에 일이 있어서 너무 늦게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

"오늘은 내가 살게. 나 한국에 다시 들어올 때는 네가 한 턱 크게 사라."

신용카드를 꺼내는 변호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카드가 단말기를 빠르게 스쳐가고, 영수증이 나온다. 그리고 신용카드가 결제됐다는 문자가 변호사의 휴대전화에 들어온다. 변호사는 기계적으로 문자내용을 확인하다가 몇 번 더 손을 움직인다. 그리고 갑자기 표정이 굳어진다. 아내에게서 온 문자를 봤을 것이다.

 

◤  변호사의 결혼식에 초대받았었다. 당시에 나는 로펌을 막 그만두고 마지막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하려고 할 때였다. 대기업 회사원과 학원 강사와 함께 결혼식장에 갔다. 학원 강사는 아르바이트로 하던 학원 강사생활을 직업으로 막 선택하던 때였고, 대기업 회사원은 한창 회사생활에 재미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적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마지막으로 인생의 변화를 줄 큰 결정을 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 시점에 변호사는 결혼을 했다.

결혼식은 성대했다. 변호사의 집에서는 잘난 아들의 결혼식을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한 게 분명했다. 배우자가 될 사람은 제법 좋은 집안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법조인이고 중소 규모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 중이라고 한다.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소리, 여자가 너무 차갑게 보인다는 소리, 변호사의 예전 여자친구의 안부를 묻는 소리... 그리고 대기업 회사원의 말이 들렸다. 결혼 전에 한번 봤었다고 한다. 성격이 예사가 아니라고 한다. 여자의 아버지가 변호사로서 대성공을 못한 것을 극복할 대리인으로 변호사를 선택한 것 같다고 말한다. 허세가 심하고 외면을 중시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때는 그냥 흘려들을 만한 소리였다. 약간의 질투와 시기가 만들어낸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야. 미안하다."

술집을 나오면서 변호사가 얘기한다.

"뭐가?"

"그냥... 예전만큼 자주 연락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게 뭐가 미안해? 나도 연락 못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아냐. 난 그냥..."

"미안할 것도 없다."

"나 담배 하나만 줘라."

"끊었잖아?"

"술 마실 때 한 두대 피는 거지 뭐."

길 옆 낮은 모퉁이에 둘이 걸터앉아 담배를 피운다. 모퉁이는 15만 원짜리 정장이나 150만 원짜리 정장이나 공평하게 받아준다.

 

"행복하냐?"

변호사가 뜬금없이 묻는다.

"행복할리가 없잖아."

"우리 시험 준비할 때는 정말 꿈이 많았었는데. 인권변호사니, 노동변호사니... 그런 변호사가 되자고 약속했었잖아."

"그때는 그랬지."

"지금 나는 변호사인데, 돈 많은 사람들 돈만 지켜줘. 꿈을 반만 이뤘어."

"나는 돈 없다는 사람들한테 돈 받으러 다닌다."

"우리 왜 이렇게 됐을까?"

"글쎄... 그냥 원래 이렇게 되기로 되어 있던 건 아닐까 싶다."

변호사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나의 생각 없는 말을 채워준다.

"그래. 어쩌면 우리 둘 다 예상하고 있었던 결론일지도 몰라. 뻔히 눈에 보이는 길을 따라오다 도착한 곳이 바로 여기일 테니까. 길을 걷기 전에는 경치도 보겠다고 생각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 짐도 대신 들어주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때부터 우리는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냥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듯이 우리 역시 정해진 길을 따라 허겁지겁 달려가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는 것을 말이야.”

변호사가 갑자기 고개를 떨구면서 말을 중단한다. 나는 그런 변호사를 아무 말없이 바라본다. 변호사는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말을 이어간다.

“아마도... 나도 그렇게 뛰다 걷다를 반복하다가 살짝 지쳤었나 봐. 그래서 그랬나 봐. 옆에서 편하게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부러웠나 봐. 그래서... 사람들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계약을 맺고 그 차 위에 올라탔었던 것 같아.”

 

◤  가난했지만 행복했었던 어린 시절... 나에게는 그런 시절은 없었다. 그저 가난했을 뿐이다. 작은 잘못에도 호되게 혼났었던 것 같다. 부모님 역시 가난에 너무 눌려 있어 자식의 작은 잘못을 용서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나는 칭찬을 받아 본 적이 별로 없다. 위로를 받아 본 적도 없다. 잘못하면 혼났고, 잘했으면 혼나지 않았다. 슬프고 울적하고 힘들어도 표현해서는 안 됐다. 기분을 표현하면 혼났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일까? 나는 다른 사람을 칭찬하거나 축하하거나 위로할 줄 모른다. 

 

"와이프가 들으면 섭섭해하겠다."

병신 같은 놈... 기껏 한다는 위로가 이 말이 전부다.

변호사가 내 말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한다.

"나는 꿈을 반만 이뤘어."

다시 한번 위로의 말을 던지려고 노력한다.

"나는 조금도 이루지 못했고... 여기 어딘가에 꺾여버린 내 날개들이 썩고 있을 거야."

병신 같은 놈.

"그래. 그리고 내 한쪽 날개도 그 옆에서 썩고 있을 거야. 그거 알아? 날개는 두 개가 있어야 하늘을 날 수 있어. 한 개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못해."

옆에 있던 친구에게서 아무런 위안을 받지 못했던 변호사의 답변은 행복하지 못하다. 한편으로는 의외였다. 친한 친구들 중에 가장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변호사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너 왜 사람들이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지 알아? 막상 자기가 원했던 지위에 올라가도 자기가 원했던 사람이 되지는 못하거든.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넓은 집, 조금 더 큰 차, 조금 더 비싼 옷을 입는 것 외에는 차이가 없어. 명함에 좀 더 그럴듯한 직업과 직급을 적는 것 외에는 아무 차이도 없어. 그래서 그러는 거야. 집을 넓히고, 차를 바꾸고, 명품 옷을 입고... 기를 쓰고 보기 좋은 직업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승진을 하려고 비굴해지는 거라고. 정작 우리의 꿈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는데 말이야."

 

  맞다. 정작 나의 꿈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나는 그저 영웅이 되고 싶었었다. 아주 어릴 때는 눈에서 광선이 나가고 하늘을 날 수 있는 영웅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현실적인 영웅상이 정립되었다. 지금 이렇게 열정이 난도질 당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꿈이 사회에게 강간을 당해 더 이상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에서도... 나는 아직까지도 위태롭게 내 믿음을 붙들고 있다. 내가 누군가의 삶을 지금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변호사가 갑자기 일어서면서 말한다.

"내 그릇 안에 사회가 원하는 걸 채워갈수록 내가 원하는 건 버려야 돼. 꿈을 반만 이룬 게 아니었어. 난 꿈을 거세당했어."

 

대로변으로 나오는 중에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택시를 기다리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호사가 택시를 타면서 외친다.

"친구야. 네가 아직도 꿈을 향해 걷고 있다면... 너의 고단함을 덜어줄 것처럼 보이는 사람보다는 너의 고단함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해라. 그리고... 미안하다."

나는 속으로 답했다.

'친구야. 언제까지 꿈을 붙들고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리고 내가 더 미안하다. 네 녀석의 자랑스러운 친구가 되지 못해서...'

 

얼마간을 걷다가 택시를 탄다. 속이 울렁거린다. 뭔가 토해내고 싶은 기분인데 울렁거림은 나를 괴롭히기만 할 뿐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알고 있다. 변호사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도 결국 지금 이 순간이 전부일 것을 말이다. 결국 변호사는 성공할 것이다. 그의 남 다른 머리, 열정, 에너지가 눈앞의 성공을 놓치게 만들 리가 없다. 가끔 성공의 한가운데서 스스로를 반성하듯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겠지만 앞으로 나와 변호사는 더 이상 ‘친구’라는 단어에 묶여 있기 힘든 관계가 될 것이다. 정말 슬픈 일이다. 서로를 모르고 지낸 시간보다 친구로서 지낸 시간이 더 오래된 사이였다. 하지만 한 명의 큰 성공과 다른 한 명의 무능함은 오랜 시간이 맺어준 인연을 아무렇지도 않게 끊어버린다.

 

갑자기 전화가 울린다. 변호사인가 보다 싶었지만 눈에 보이는 건 익숙한 이름 석 자이다.

"야 이 새끼야! 너 어디야! 내가 오늘은 기필코 너를 죽인다!"

이제는 친근한 느낌마저 드는 대사이다.

"사장님, 지금 어디세요?"

"뭐?"

"오늘 저하고 술 한잔 하시죠. 한잔 더 하고 싶은데 마실 사람이 없네요."

"네?"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어디세요?"

전화가 끊긴다. 갑자기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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