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쟁이 (3)
-3-
알람인가 싶었는데 벨 소리였다. 쉼표 없는 인간이다.
"야! 너 어디야! 이게 이제는 하다 하다 무단결근까지 하려고 해? 너 어디야?"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었다.
"죄송합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30분 내로 튀어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빨라야 1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어차피 서둘러 도착해도 점심시간.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느긋하게 샤워를 마치고 지하철 역으로 향한다. 점심때의 출근은 여유가 있다. 지하철에 사람도 별로 없고, 행여나 차를 놓칠까 허둥지둥 나가지 않아도 된다. 가벼운 지하철은 그 무게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지하철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머리를 백지상태로 만들어 간다.
"왜 이제와!"
비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무실에 쉼표 없는 인간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좀 늦었습니다."
"조금 늦어? 이게 조금이야?"
"죄송합니다."
어제 늦게까지 마신 술 탓에 목 근육이 약해졌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마 허리 근육도 약해졌나 보다. 허리까지 숙여진다.
"따라와!"
어디를 데려가나 싶었는데 회사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불편했다.
"저... 오늘 오후에 외근일정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쉼표 없는 인간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적지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상대는 공무원이다. 가족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사채를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동안 차곡 차곡 모아 두었던 돈은 이미 다 사라져 버렸고 급여에도 압류가 걸려 있다. 이런 상태에서 돈을 빌려주었던 지인 몇 명이 추심을 의뢰했다. 제법 큰돈이었다. 그 정도로 큰돈을 빌려줬을 정도면 신뢰가 두터운 사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을 의뢰했을 당시에는 의심이 신뢰를 대체한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어딘가에 숨겨둔 돈이 있을 테니 무조건 받아 달라고 했다. 수수료는 문제가 아니고 응징의 측면에서 받아 달라고 했다. 법이 해결을 못하니 법 보다 가까운 수단으로 어떻게든 돈을 받아 달라고 했다. 법 보다 가까운 수단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었다.
공무원에게 전화를 한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네. 지금 바로 나갈께요. 10분 정도만 기다려 주세요."
"네."
짧은 통화 후에 긴 기다림은 일반적이다. 근처 커피숍에 들러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는 잠시 옛날 생각을 한다.
◤ 변호사가 1차 시험에 합격하기 전에는 항상 함께였다. 하지만 변호사가 2차 시험준비를 위해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자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혼자서 하면 몇 배는 힘들어진다. 그때의 힘든 시간을 커피를 마시면서 달랬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커피숍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었다. 기업들이 커피를 팔지 않았던 때이기도 했다. 커피숍에 들어가면 그저 아이스커피와 뜨거운 커피만이 있었던 때가 그때였다. 하지만 고시를 준비할 때에는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커피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커피의 이름도 다양해졌고, 사람들은 이름 어려운 커피를 자연스럽게 주문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처음으로 이름 있는 커피숍에 들어갔을 때는 무엇을 시켜야 할지 몰랐다. 그냥 가장 싼 커피를 주문했다. 그게 바로 에스프레소였다. ◢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갑자기 나의 생각을 끊으면서 공무원이 나타났다.
"아.. 네. 잘 지내셨나요?"
나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면서 가볍게 목례를 한다.
"제가 입금을 잘 못하고 있죠? 이것 저것 빼고 나면 생활비로도 빠듯해서..."
바로 본론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공무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당신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죄가 있다면 이 사회가 죄가 있는 것이다.
◤ 대학교 법철학 시간이었다. 법철학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법이란 무엇일까요? 가난하고 약한자를 보호하는 게 법일까요? 아닙니다. 법은 권리 가진 자를 보호하고 이를 침해한 자를 제재하는 것입니다. 권리를 가진 자가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침해한 자가 아무리 사회적 약자라 하더라도 법은 권리를 가진 사람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침해한 자를 제재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권리 일부를 박탈하는 경우도 있죠."
학생들은 이 말에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러한 말에 완전히 수긍할 수는 없다는 표정이었다. 법철학 교수님은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들 모두 동의하기 힘들죠? 이유가 뭘까요? 바로 감정이라는 것에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명제가 감정에 일치하지 않을까요? 여러분들 모두 법을 공부하는 학생인데 말입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의 보호를 받는... 보통 우리가 말하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감정의 반발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설령 그들의 재화나 권력, 지위에 아무런 윤리적 하자가 없다고 하여도,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갖는 반발의 원인이 시기나 질투심에 있다고 하여도 우리는 그렇게 느끼고 생각합니다."
법철학 교수님은 학생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학생들의 대다수는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하는 표정으로 교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답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한 번 정도는 동일한 질문을 받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그저 여러분께 미리 알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정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윤리적, 법적으로 하자 없는, 아니 정당한 것을 보호하는 편에 설 것이냐, 아니면 이론적 타당성이나 논리적 세련미 같은 것은 모두 걷어내고 여러분이 느낄 감정에 충실할 것이냐 하는 골치 아픈 문제가 여러분의 인생 곳곳에 숨어있을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
"개인회생 신청하시죠."
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본능에 가깝게 오래전 들었던 예언의 끝을 마무리한다.
"네?"
공무원은 당황했다. 돈을 받기 위해 온 사람이 회생을 권유한다는 게 놀라웠을 것이다.
"어차피 이 상태로는 정상적인 생활 힘드십니다. 채권자들 역시 모든 돈을 회수하기 어려울 거예요. 약간만 뻔뻔해지시면, 선생님과 가족들은 편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돈을 빌린 것은 사실입니다. 회사에서 잘릴 걱정없이 계속 일할 수 있구요. 갚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갚아야죠. 하지만 이건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입니다. 채권자들에게 돈을 갚기 위해서 선생님의 가족에게 빚을 지는 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가족들이 선생님께 행복할 권리를 처분하라고 허락한 적이 있었나요? 다른 사람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가족에게 빚진 것들은 어떻게, 언제 갚으실 건가요? 제 말 대로 하십시요. 개인회생 신청하세요."
침묵이 흘렀다. 고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는 사무실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개인회생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보고하겠습니다."
스스로도 어색한 대사를 뒤로 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개선하는데 한 몫 했다는 기분에 내가 자랑스러웠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 그들은 분명 남들과 다른 특별한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공무원들 중 일부는 부정하거나 윤리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나하고는 상관없다. 내 앞에 앉아있던 대부분의 공무원은 채무자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있는 사정으로 빚을 진 사람들이었고,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사유로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일 뿐이다. 이론적 타당성? 논리적 세련미? 그런 것을 따지기에 나는 너무 천박하다. 그냥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친구와의 관계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한 번은 이렇게라도 감정적 사치를 누려보고 싶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지하철에 탔다. 마침 빈 자리가 눈에 띄어 자리에 앉는다. 변호사는 잘 들어갔는지 궁금했다. 연락을 해도 될지 한참을 고민하다 문자를 보내기 위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 어머니다. 집에 전화를 하려던 찰나에 통화목록에 눈이 간다. 새벽 1시쯤에 익숙한 이름 석자와 통화한 내용이 있다. 그리고 새벽 3시쯤에 쉼표 없는 인간과 통화한 내용이 있다.
'이건 뭐지?'
발신통화다. 약 15분 가량 길게 통화했다.
'이건 뭐지?'
추심업무를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통화내용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편해지더니 이제는 자동으로 녹음할 수도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제... 아니, 오늘 새벽 3시에 이루어진 통화내용을 들어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어폰을 통해서 들려오는 내 목소리는 만취한 상태였다. 스스로를 18류라고 칭하면서 왜 나를 괴롭히냐고 따지고 있었다. 쉼표 없는 인간은 말없는 인간이 되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꿈이 있었다고 말한다. 나도 힘든 사람들 도와가면서 살고 싶었다고 말한다. 나도 내 삶을 돌아보면서 스스로 감동받기를 원했다고 말한다. 단순히 살기 위해 살아가는 인생은 싫다고 말한다. 그렇게 15분을 혼자 소리치고 떠들었다. 언젠가부터 이어폰 속의 나는 울먹이고 있었고, 이어폰 밖의 나는 인상이 구겨지고 있었다. 그 사이 쉼표 없는 인간은 아무런 대꾸 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조용히 말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나도 너처럼 꿈이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렸다. 지상으로 올라와 급하게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불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깊이 들이마시면서 가슴 한가운데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애써 눌렀다. 어제 변호사와의 술자리에서 뚫린 가슴 한가운데가 지져지고 있는 기분이다. 답답한 마음에 넥타이를 풀어헤쳐 바닥에 던진다. 바닥에 떨어진 넥타이는 공교롭게도 흙탕물에 스며든다.
'멍청한 녀석...'
속으로 나를 욕한다.
넥타이를 사기 위해 근처 매장으로 향했다. 아무거나 저렴한 넥타이를 하나 골라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메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새 넥타이를 매고 있는 내 모습을 보자니 로펌에 면접을 보기 위해 방문했던 날이 기억난다.
◤ 면접 보는 날 아침, 아버지는 처음으로 내 구두를 닦아 주셨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나에게 넥타이를 메어 주셨다.
로펌은 몇 년치의 연봉을 모아야 살 수 있을까 싶은 고급 승용차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거대한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건물은 내부와 외부 모두 세련된 모습으로 치장하고 있었고, 입구에서는 검은색과 흰색 계통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면접을 마치고 건물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이곳에서 평생을 일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나는 그곳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 후 또 얼마 후에 깨달았다. 이곳은 내가 평생을 일할 곳이 아님을 말이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신입변호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나보다 어린 신입변호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신림동에서 스쳐가며 얼굴을 익힌 사람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계속 고민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 회사를 그만둘지 말지를 말이다. 나보다 어린 변호사들 밑에서 일하는 것도 싫었지만, 그 보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낸 사람들의 뒷모습을 부러움과 시기심으로 바라보는 내 모습이 너무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예전에는 음식을 흘리거나 양치를 하다 치약을 흘리면 대부분 가슴에 묻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배 위에 묻기 시작했다. 주말 연속극을 보고 계시는 부모님께 웃으면서 말했다. 요즘에는 왜 자꾸 뭘 흘리면 배 위에 흘리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부모님은 연속극을 보시면서 답하셨다.
'높은 사람들이랑 있으면서 좋은 것만 먹으니까 그렇지. 너 요즘 얼굴이 얼마나 좋아졌는데.'
내가 싫어하지만 저항할 수 없는 사람에게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졌다. 그리고 일주일이 더 지난 월요일, 나는 출근하면서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오늘 사표를 낼 것이라고 말이다. ◢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넥타이를 고쳐 메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사무실에 들어오니 대부분 외근을 나간 상태였다. 쉼표 없는 인간은 무엇이 그리 심각한지 오만상을 쓰면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아마 실적이 문제일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실적은?"
"그... 공무원 있지 않습니까? 시청에서 일하는... 그 사람 개인회생 신청한다고 합니다."
쉼표 없는 인간은 나를 살짝 올려다 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면서 손을 흔들어 자리로 돌아가라고 한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다 말고 주위를 살펴본다.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궁금했다. 다시 쉼표 없는 인간에게 다가간다.
"어떤 꿈이셨습니까?"
쉼표 없는 인간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기억 못할 줄 알았는데?"
"통화기록이 있기에 녹음된 파일을 들었습니다. 제가 입사할 때 말씀하셨잖습니까. 모든 통화를 녹음하라고..."
"그래."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쉼표 없는 인간이 안경을 벗으면서 말한다.
"지금은 이 바닥도 정말 좋아진 거야. 내가 처음 시작할 때는 더 심했어. 그때 나도 너처럼 힘들었던 적이 있었단 말이야. 그리고 더 짜증 나는 선배도 있었고. 언젠가 내가 선배한테 물었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왜 이 직업을 선택한 건지 물었어. 그리고 왜 직장을 못 옮기는지 물었어. 정작 나도 그러면서 말이야! 선배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인류가 생긴 이래로 수렵과 채집은 남자의 몫 이래! 수렵과 채집을 못하는 남자는 병신이라는 거야! 병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최소한 가족에게라도 병신취급 안 당하려고 있다는 거야! 알아!?"
처음에는 나지막하게 시작했던 쉼표 없는 인간의 목소리가 평상시처럼 올라가기 시작했고, 나는 아무런 답을 못하고 있었다.
"지난 꿈이 뭐였는지가 중요해? 누가 알고 싶어하는데? 너만 배불러서 지난 꿈에 허우적거리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그럴 여유도 없어! 당장 다음 달 월세 내는 걸 걱정하는 사람들이야! 그런데도 자식들은 이 세상 전부를 갖고 싶다고 칭얼댄단 말이야! 꿈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삶의 짐이야! 알아? 네 놈의 꿈!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야!"
5분 가까이 쉼표 없는 인간의 고성은 계속되었고, 단어는 듣는 사람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악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이 사람은 버려진 꿈에 허우적거릴 여유도 없는 것뿐이다. 그저 다음 달 월세가 걱정이고, 세상 전부를 갖고 싶은 자식들이 걱정일 뿐이다. 복잡해지고 있는 머리와 마음을 헤집고 쉼표 없는 인간의 마지막 말이 꽂혀 들어왔다.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내 가족 눈에 피눈물이 흘러!"
현실은 가혹하다. 그 뿐인 것이다.
"야! 뭘 잘못했길래 사무실 시끄럽게 하냐?"
퇴근하는 내 어깨를 툭 치며 8류가 묻는다. 쉼표 없는 인간과의 대화를 묻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나와 쉼표 없는 인간의 대화를 들었었나 보다.
"어? 형!"
"조용히 좀 살자."
"미안해..."
"뭐가 걱정이야? 이 형님께서 상담해 주마."
로펌을 그만 둔 이후로 집을 나와 살았다. 그리고 이제는 딱히 집에 가도 할 일은 없었다. 퇴근길에 나를 잡아주는 사람이 고마울 때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런 날 중에 하루다. 회사 근처의 호프 집에 들어가서 맥주를 시킨다. 바싹 마른과자를 먹으면서 8류가 말한다.
"예전에는 맥주 한잔 하면서 담배 피는 게 낙이었는데. 이제는 그럴 곳도 없어."
"그러게."
"그나저나 무슨 일이었던거야? 무슨 재활용이 안되니, 피눈물이 나니... 그건 또 뭔 소리야?"
간단히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다. 내 이야기가 계속되던 중에 40대 초반 정도 되는 여자가 맥주 2잔을 들고 테이블로 왔다. 40대 초반의 여자는 우리를 보고 가볍게 웃으면서 맥주를 각자의 앞으로 옮겨 줬다. 나와 8류 역시 목례로 답하며 맥주잔을 받았다. 8류는 맥주를 길게 한 모금 마신 후 나에게 말한다.
“그러니까, 너는 꿈이 있는데... 아니 있었는데, 지금은 그 꿈이 아무 의미 없다? 그거냐?”
“아니,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그럼. 너는 그 쉬지도 않고 말하는 인간한테는 꿈이 없는 줄 알았었는데, 그 인간도 꿈이 있었다?”
“지금 나 놀리는거야? 아니면 말 길을 못 알아듣는 거야?”
“야 인마! 니가 지금까지 했던 말을 되돌려봐, 핵심이 없잖아, 핵심이!”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도 안 났다. 그냥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핵심이 뭐였을까? 핵심이 뭐였는데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걸까?’
“이 새끼, 완전 빠져가지구. 넌 그냥 욕먹어서 기분 나쁜 거야.”
‘아.. 젠장. 얘기가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거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생각을 고른다.
"형. 그런데 우리는 뭐 하는 사람이야? 예전에 형이 얘기한 것처럼, 이 일 좋아서 하는 사람 없잖아? 그런데 왜 다들 그만두지 못해?"
"몰라서 물어?"
8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너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알면 왜 물어. 형은 나 보다 이 일 오래 했잖아. 잘 알 거 아냐."
“그걸 꼭 몇 십 년 일해야만 알 수 있냐? 당연히 나도 다른 일 하고 싶지. 그런데 어쩌냐? 갈 곳이 없는 걸. 자기 일 좋아서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냐? 너가 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 법무팀 가봐. 거기 비변호사 직원들은 변호사들한테 치여서 일 못하겠다고 하고, 변호사들은 기껏 고생해서 시험 붙고 연수원 나왔더니 2미터도 안 되는 책상하고 파티션에 갇혀서 박봉으로 일한다고 불만 가득해. 그렇다고 빅펌들 변호사는 뭐 많이 다른가? 허구한 날 새벽에 집에 들어가고, 의뢰인들한테 욕먹고, 판사나 검사한테 싫은 소리 듣고... 그렇다고 판사나 검사들이라고 고민 없겠냐? 그런데 그 사람들 왜 못 그만두냐? 왜 너는 대기업 법무팀 못 가고, 법무팀 비변호사는 다른 부서 못 가고, 변호사들은 자기 사무실 개업 못하냐? 답은 하나야. 현실에서 자기가 가장 잘할 것 같은 일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거든. 다른 곳 가고 싶지. 그런데 어쩌냐? 막상 가려고 해도 갈 수도 없고, 설령 갈 수 있다고 해도 겁부터 나는 걸. 받아준다고 해도 못 가는 경우도 많아."
8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예전에 내가 너한테 이 회사 왜 왔냐고 물었을 때 뭐라고 했었냐? 추심도 법의 영역이어서 배운 걸 써먹기 위해서라고 했지? 맞아. 추심도 법의 영역이야. 그래서 최근에는 변호사들이나 법무법인도 추심하는 곳 생기잖아. 그런데, 너 이 일 하면서 소송이나 소송 비슷한 거라도 해 본 적 있냐? 없지? 당연하지. 추심회사에서는 소송 못하게 법으로 막아 놨거든. 그리고, 너 추심회사에서 법대 출신 우대하는 거 몇 번이나 봤냐? 채용공고만 봐도 대부분 고졸이나 전문대졸이 학력 하한선이야. 고졸이 법학 전공한 거 봤냐? 전문대 중에 법학과 있는 학교 몇 개나 될 거 같냐? 무슨 얘기인 줄 알아? 추심은 법의 영역이겠지만, 우리가 하는 일에는 법에 대한 기초지식 이외의 건 필요 없다는 거야. 괜히 법 전공한 것들끼리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추심도 법의 영역이니 뭐니 변명거리 만들어 내는 거라고. 오히려 말 잘하고 어디 가서 주눅 들지 않는 사람들이 추심은 더 잘해.”
8류는 나에게 답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장황하게 본인을 생각을 말했지만 그의 말을 끊고 싶지는 않았다. 8류의 말은 잔인했고, 현실이었고, 옳았다.
“뭐... 그래. 백번 양보해서 네가 사법시험 붙어서 변호사 됐다고 하자. 뭐... 이제는 사법시험도 없어졌지만... 아무튼, 이래저래 시험 준비하고 연수원 졸업하면 어느덧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하기 시작하겠지. 그리고 변호사 되고 어떻게 대출받아서 사무실 차렸다고 하자. 너 뭐 할 것 같냐? 난 네가 추심전문변호사 한다는 데 내 오른쪽 팔 걸 수 있다."
반박할 수 없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안 그래도 낮은 나의 자존감을 땅 속 깊이 박아 넣고 있었지만 뭐라고 답할 수 없었다. 8류는 계속 말을 이어간다.
"너 이솝우화 알지? 거기서 여우 한 마리가 나오잖아. 포도 따 먹으려고 발광하는 여우. 결국에는 어떻게 되냐? 포기하지? 그리고 나서 여우가 뭐라고 그래? '어차피 저 포도는 맛이 없을 것 같다.' 하고 돌아서지? 이 세상 다 똑같아. 아무리 발광해도 못하는 건 못하는 거야. 그래도 내 능력이 부족해서 못한다고 하면 얼굴이 안 서잖아. 그럴 때 필요한 게 바로 변명이고 핑계야. 그런데, 그거 아냐? 변명이나 핑계 없이 이 세상 살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만약 여우가 계속 포도만 먹으려고 날뛰었으면 결과는 어떻게 됐을 것 같냐? 아마 지쳐 죽었거나, 미쳐 죽었을 거다. 너는 아직 젊고 시간이 있으니까 포도를 향해서 이리저리 날뛰는 중이지만 조금만 지나 봐. 너도 결국에는 '저 포도는 맛없다'라는 결론 내리고 그냥 현실에 안주하게 될 때가 올 거야. 어차피 가장 높이 뛸 수 있는 점프는 처음 5번 안짝에 있는 거야."
8류가 남아 있던 맥주를 마저 마시면서 말한다.
"돈을 빌려줬으면, 갚는 게 맞아. 채무자들 편에 서면 딱하지. 불쌍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딱하고 불쌍한 게 우리 탓이냐? 어차피 우리가 돈 받으러 가지 않는다고 해도 그 사람들은 행복해지지 않아."
"하지만.. 그 사람들 가족은? 자식들은?"
"분명 딱한 일이지. 하지만 결국에는 똑같아. 그들이 불행한 이유가 우리에게 있지는 않아. 너는 설마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지 않으면 채무자와 가족들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가 그들을 잊고 지내면 아무런 문제 없이 채권자와 채무자가 모두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추심하는 사람들 이미지가 왜 안 좋은 줄 알아? 예전에는 법으로 안되던 걸 주먹으로 추심했고, 아직도 그 잔상이 사람들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그런 거야. 차라리 채권추심업무를 양지로 끌어올리는 게 그 사람들한테는 다행인 거라고. 우리는 최소한 칼 들고 협박하지는 않잖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묘한 감정이 반박을 하고 싶게 만들고 있다. 8류는 잠깐 숨을 몰아 쉬면서 말을 이어간다.
“직업에 귀천이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필요 없는 직업은 없더라. 천하던 귀하던 다 필요해서 직업이 있는 것이고, 우리도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 이 일 하는 거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현실에 익숙해지고 다른 곳으로 옮기기 두려워지면 자연스럽게 적응돼. 이유 따위는 없어. 단지 눈앞에 있는 현실만으로도 버거운 거야."
묘한 감정을 뒤로 밀어내면서 그동안 궁금해왔던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형. 학교 다닐 때 열심히 공부 안 했으면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아야 돼? 정해진 시기에 자기 꿈을 이루지 못하면, 그냥 이렇게 꿈은 꿈대로 두고 살아야 돼? 왜 실패했다고 해서 이렇게 가혹한 대가를 받아야 돼?"
8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 답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패한 사람들에게 벌주는 곳이 아니야. 그냥 현실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현실을 벗어난 거고."
◤ 어릴 적 부모님께서 항상 말씀하셨다. 가난은 현실이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다. 하지만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현실은 가혹하다. 그리고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공을 해야 한다. 성공을 해야 행복할 수 있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원하는 직업을 갖는 것이 성공인가? 원하는 만큼 돈을 벌면 성공하는 것인가? 행복은 또 무엇인가? 성공이 곧 행복인가? 사람들은 행복하길 원하고, 성공하길 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행복이 무엇인지, 성공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지 못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진정 원했던 것은 사법시험 합격이 아니었을 것이다. 변호사 자격증은 단지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어려운 사람을 법으로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원했던 진정한 것의 실체는 가늠도 못하는 상태에서 "법"이라는 한 글자에 얽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
속이 답답하다. 풀리지 않는 문제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빨리 토요일이 왔으면 좋겠다.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잠에 취해 현실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