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쟁이 (4)
- 4 -
출근길은 언제나 불쾌하다.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으면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체취가 느껴진다. 다음역에 도착하면 도저히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은 공간을 비집고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온다. 하지만 이런 고통은 서 있는 사람들의 몫에 불과하다. 앉아있는 사람들은 평온한 표정이다. 모두 서 있는 것이 현실이고, 앉아 있는 것은 성공한 것이다. 종점에 살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 우리와 시작점이 다른 것이다. 개중에 운 좋게 빈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간혹 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인생과 똑같다.
작은 인생을 경험하고 다시 큰 인생의 무대로 올라왔다. 쉼표 없는 인간은 실적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구박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과 몇 일 전만 해도 내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싫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분이 가볍다. 내 감정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고, 나의 술 주정을 감내하고 나서도 예전과 똑같이 나를 대해주는 쉼표 없는 인간의 태도가 고마웠다.
"야!"
잠깐 딴 생각을 하는 동안 쉼표 없는 인간이 나를 불렀다.
"야! 내 말 안들려?"
"죄송합니다."
"신규업무 확인해! 알았어?"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회사계정에 로그인한 후 새로운 업무를 확인했다. 이름만 말하면 알 수 있는 대기업에서 몇 건의 사건을 의뢰했다. 직접 추심을 진행하다 남은 금액을 우리 회사에게 의뢰한 것이다. 나에게 할당된 사건은 전역한 장교를 상대로 하는 건이다. 제법 유명한 대학의 학군단 출신으로 약 10여 년 전에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역 후 대기업 프랜차이즈로 창업을 하였으나 얼마 전 그만뒀다. 현재는 업종을 바꿔 택배 대리점을 하고 있다. 어쨌든 경제활동을 하고 있으니 추심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딱히 할 일이 없어 의뢰서에 적혀 있는 휴대전화로 바로 연락을 한다.
"네. 안녕하세요!"
중후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방금까지 뛰어다녔는지 숨이 찬 것 같다. 간단하게 신분과 용건을 말했다.
"제가 지금 일을 하고 있는데, 괜찮으시면 10시 이후에 전화드리겠습니다."
시계를 살짝 보니 10시가 조금 넘었다.
"지금 10시 넘었는데요?"
"아... 저녁 10시 말입니다. 괜찮으십니까?"
일몰 후에 추심은 불법이다. 하지만 채무자가 직접 연락한다는데 문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은 후에 좀 더 자세히 의뢰서를 살펴본다. 대기업에서 의뢰한 사건답게 자료가 제법 풍부하다. 아까는 그냥 넘겼던 이력서를 살펴본다. 명문 대학교를 나와서 간부로 입대를 했다. 군수장교로 꽤 오랫동안 일하다 나이를 꽉 채워 전역을 했다. 그리고 대기업 프랜차이즈로 창업한 후 3천만 원의 채무를 가진 상태에서 택배 회사로 옮겼다. 대기업에서는 3천만 원 중 2천만 원가량을 회수했다. 5백만 원은 개설 당시에 받았던 현금담보로 상계를 했고, 나머지는 보증보험을 청구해서 회수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온다.
'아... 보증보험 청구까지 했으면 힘들겠는데...'
보증보험은 금융기관에 준하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많은 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실적 좋은 추심회사들과 연계되어 있다. 막대한 정보력과 인력을 바탕으로 채권을 추심하기 때문에 보증보험으로부터 추심받은 사람에게는 돈을 받아 내기가 훨씬 어렵다.
"뭐 보냐?"
"어? 형! 안녕하세요!"
우리 회사 최고의 인재다. 말 그대로 1류 인재다. 매끄러운 일처리와 원만한 대인관계, 탁월한 법률지식으로 최고의 인재로 인정받고 있다. 얼마 전에 개인사정으로 휴직을 했었다. 통상적으로 휴직은 사직과 같은 것이지만 1류에게는 예외였다.
1류는 서류를 한번 쓱 보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보증보험까지 청구했으면... 쉽지는 않겠네."
"복직하신 거예요?"
"응. 다음 주부터 정식 출근. 오늘은 잠깐 짐 옮기려고 왔어. 잘 지냈고?"
"네. 형도 건강하시죠?"
"그럼. 아직 담배 피우지? 밖에 나가자."
1류는 나를 각별히 대했다. 이름 없는 지방대 출신이었던 1류는 사법시험 2차에서 몇 차례 낙방한 후 변호사 사무실을 거쳐 추심회사에 입사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여자친구가 임신을 했고 1류는 급하게 취업을 할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했었지만, 나중에 지인을 통하여 우리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8류는 우리 업무에 법학지식은 필수적이지 않다고 했지만, 1류는 이런 말을 비웃듯이 법학지식을 십분 발휘해서 일을 한다. 과거의 경력을 살려서 법무팀이 없는 작은 회사나 개인에게 법무 컨설팅이나 소송서류를 작성해 주는 등 본업 이외 서비스로 많은 단골고객을 확보하면서 점점 회사에서 인정받는 인재로 성장했다. 처음 내가 입사했을 때, 내가 로펌에서 일했었다는 소문을 들었던 1류가 나에게 먼저 말을 붙이게 된 것이 친해지게 된 계기였다.
"형. 그런데, 왜 휴직하신 거예요?"
"법무사 2차 시험 준비하느라고.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고."
"아! 잘 보셨나요?"
"응. 그럭저럭. 특별한 이슈 없으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아."
대학 선배 중에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호사(好事)가 아니라면 무사(無事)가 답이다.'
"시험 준비하는데 시간 많이 뺏기지 않아요? 애기도 있고... 형수님이 뭐라고 안 하셨어요?"
"물론 허락받고 했지... 너도 가끔 경험해 봤지? 잘 자고 있다가 갑자기 시험에 떨어진 것 생각나서 벌떡 벌떡 깨는 거 말이야."
"네... 몇 번 있었죠."
"나도 모르게 한 두어 번 그랬었나 봐. 와이프가 법무사 시험이라도 준비해 보라고 권하더라. 육아는 자기가 전담한다고 하면서..."
"형수님도 일 하시잖아요."
"몇 배로 힘들게 애 키운 거지 뭐."
"언제 발표예요?"
"3개월 정도 있다가."
"일이 손에 잡히겠어요?"
"어쩌겠냐. 마냥 기다려야지."
짧은 침묵이 어색했는지 1류가 말을 이어간다.
"그나저나, 아까 그 사건은 어떻게 진행할 거냐?"
"아... 일단 한번 만나 봐야죠."
"그래야지. 사람 상대하는 일인데, 서류만 보고 일해서는 안되지. 택배 대리점 한다고 했지?"
"네."
"보증보험까지 청구한 건이면 쉽지는 않겠네."
"네. 일단 한번 보고 시작하려고 아까 통화했었는데, 밤 10시는 돼야 통화가 가능하다고 하네요. 많이 바쁜가 봐요."
"그래... 너도 알겠지만, 택배 대리점 사장이라고 해도 배송하는 건 직원이랑 똑같으니까."
"맞아요. 예전에 택배대리점 추심했던 건은 미팅일정 잡기도 쉽지 않았어요."
"그렇지... 그럴 때는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는 것도 답이야."
"일하는 곳이요? 그분들은 계속 움직이잖아요?"
"그렇지."
"약속장소 정하기도 힘들고, 괜히 일하는 중간에 찾아가기도 뭐 하잖아요?"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 맞춰가도 되는 거고."
"그분들은 식사시간도 불규칙하던데요."
"그럼 주말에라도 만나봐. 그래도 주말은 조금 더 한가하지 않을까?"
나에게 주말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축복받은 날이다. 그런 주말에까지 일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변했다. 변한 내 얼굴을 보고 1류가 웃으면서 말했다.
"주말에까지 가서 만나보기는 싫은가 보구나? 그래... 누가 주말에까지 일하는 걸 좋아하겠어."
"꼭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주말에 약속이 있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했어요."
있지도 않은 주말약속을 만들어 내면서 애써 이미지를 관리한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한 번 보게 되면 배우는 게 있을 거야. 업무적인 부분 말고, 그냥 소소한 인생사 말이야. 채권추심이라는 일이... 일만 바라보면 남는 게 없어. 후회스럽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 그러지. 가끔 내가 할 일이 이것밖에 없나 싶기도 하고. 우리는 채권추심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스스로가 이 일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어. 무슨 몹쓸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들 사는 것 보면서, '이 사람들도 결코 편하게 사는 건 아니구나. 내가 더 나을 수도 있겠다.'라는 가벼운 자위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아."
1류가 하는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1류는 조금만 있으면 법무사가 되어서 이곳을 벗어날 사람이고, 나는 계속해서 이곳에 묶여 있어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우리 일을 평가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약속이 급한 거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거 아니면 견학 간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다녀와봐. 일에서 만족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일을 하면서 접할 수 있는 것 들로부터 만족을 느낄 수도 있는 거잖아."
약간의 침묵이 이어졌고 1류가 말한다.
“들어갈까?”
나는 잠깐 망설이다 답을 한다.
“죄송한데, 잠깐 전화 한 통만 하고 들어갈게요.”
“그래? 그럼 천천히 들어와. 난 먼저 간다.”
1류의 등을 보면서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원래 1류를 정말 좋아했었다. 인생의 모델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 1류는 유일하게 닮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편협한 마음은 1류를 조금씩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아마도 1류는 더 이상 내가 닮고 싶어도 닮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확인되었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리라.
‘그래… 18류가 1류와 닮아가길 원했던 것 자체가 무리겠지. 시기심 없이 동경하는 게 최선일 거야.’
뭔가 허한 느낌에 담배에 불을 붙인다.
"쟤는 회사 다시 돌아온데?"
누군가 묻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아.. 부장님. 안녕하세요."
추심은 정말 잘 하지만 인성이 별로라는 평을 받는 사람이다. 예전에 다른 대형 추심회사에 있다가 지금의 회사로 이직한 덕에 실력만 보면 최소한 2~3류 정도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평가하는데 인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니, 아마도 6류 정도로 보면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네. 다음 주부터 출근하신다고 합니다."
"뭐 하는 건지... 나갔으면서 뭘 다시 기어들어와?"
6류는 1류를 싫어한다. 자기가 실력에서도 성과에서도 우위라고 생각하지만 평가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불만이다. 그리고 그 불만은 1류에 대한 적대감으로 표현된다. 1류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역시 6류의 적대감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6류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나는 애써 6류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호감도 가지고 있다. 일단 업무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무언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퉁명스럽지만 짧고 정확하게 답을 알려줬다. 6류의 대인관계기술이 서툴거나 혹은 원래의 말투 자체가 거칠어서 그렇지 나를 싫어한다거나 무시한다는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다. 나는 이런 6류의 성격이 싫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가끔 시간이 날 때마다 담배도 같이 피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저... 부장님. 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질문하기에 적절한 시점은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이상한 질문을 하는 것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게다가 6류와 내가 이런 질문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가 하는 의문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는 궁금증과 갈증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말해."
짧고 퉁명스럽다.
"부장님은 이 일 하면서 만족감을 느껴 보신 적이 있나요?"
아마도 1류에 대한 나의 편협한 마음이 1류를 싫어하는 사람한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어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6류가 그것을 알리는 없다. 나를 살짝 쳐다보는 6류의 의아해하는 눈빛이 그것을 말해준다. 짧은 시간이 흐른 후 6류가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정면을 보면 말을 꺼낸다.
"예전에, 한 2년 됐나? 어떤 아줌마가 사건을 의뢰했어. 시장에서 생선 파시던 분인데, 무슨 관리비니 뭐니 하는 명목으로 건달들한테 돈을 주고 있었나 봐.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줌마가 생선가게 그만두려고 하는데 누가 얘기했대. 그동안 냈던 관리비는 불법이니까 다시 받을 수 있다고 말이야. 그 용감한 아줌마는 알음알음 싼 값에 변호사 고용해서 소송은 이겼어. 그런데 그러면 뭐 해? 돈을 못 받는데. 어디 시장 건달들이 소송 졌다고 순순히 돈을 주길 하겠냐, 아니면 재산조사한다고 뭐 나오는 게 있겠냐? 그래서 우리한테 왔지."
"그래서... 다 받으셨어요?"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이야기다. 6류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짧게 답했다.
"응."
"어떻게요?"
"목숨 걸고 받았지. 얼마 되지도 않는 수당 받으려고."
"왜요?"
"네가 물었잖아. 만족해 본 적 있느냐고."
갑자기 6류가 멋있어 보였다. 6류에 대한 주변 평판을 의식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저기... 부장님."
"왜?"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어요?"
"뭐? 돈 없는 사람 대신해서 돈 받아주는 거?"
"네."
"몇 번 없어. 그래도 찾아보면 비슷한 사건들은 제법 많을 걸?"
"그래요?"
"돈 없다는 게 단지 끼니를 거르거나 병원에 못 가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아. 돈 없어서 돈 못 받는 사람도 많아."
"그래도, 받으면 결국에는 주머니에 없던 돈 생기는 거잖아요."
"착수금은 생각 안 하냐? 많은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한테는 큰돈이야. 그리고, 돈 없는 사람이 몇 억씩 받아 달라고 의뢰하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몇 백이고 많아야 천만 원 조금 넘는데... 누가 거기에 몰두해서 일하냐? 우리도 먹고살려면 큰돈, 받기 쉬운 돈 받아야 하고 계속 사건 의뢰해 줄 사람한테 잘해 줘야지. 결국에는 착수금만 나가고 못 받을 가능성이 높은 거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런 걸 느끼는 거야."
머리가 살짝 복잡하다. 택배기사에게 돈을 받는 것보다, 택배기사를 위해 돈을 받아주는 게 더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굶어야 할 수도 있다.
"너, 요즘에 고민 좀 하는가 본데, 이 일도 하다 보면 기분 좋은 일 생겨. 정 그런 일이 안 생기면 스스로 기분 좋게 일을 해 보던가."
"어떻게 하면 기분 좋게 일을 하는데요?"
"너랑 친한 꼴통 하나 있잖아. 어린애. 채무자 아들 밥 사줬다는 애 있잖아."
"아... 네. 소문 참 많이도 퍼졌네요."
"그렇게 일해 봐. 그냥 마음 가는 데로, 하고 싶은 데로 하면서 일해 보란 말이야. 내가 무식해서 잘 모르는 것이겠지만... 머리 아프게 명분 따위 만들어 봤자 내 기분에 안 맞으면 다 필요 없어. 내가 무슨 천하를 통일할 거냐, 인류를 구원할 거냐? 명분이니 뭐니 하는 형식적인 것들 다 버려버리고,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뭔지를 생각해 봐."
6류는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피우면서 급하게 말을 마무리한 후에 사무실로 돌아갔다.
'하... 가능하긴 한 말인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머리만 아프네.'
또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전역장교는 군인 출신답게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10시가 되자 전화가 왔다.
"죄송합니다. 낮에는 전화통화를 길게 하기 힘들어서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떤 용건 때문에 그러시나요?"
나는 채권추심을 의뢰받았다는 사실을 간단히 설명했다. 전역장교는 중간중간 내 말을 듣고 있다는 표시를 했지만 내가 모든 설명을 마칠 때까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어려운 상대일 것 같다.
"그렇군요. 그런 용건 때문이라면, 한동안은 연락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채무부인이다. 가장 머리 아픈 사안이다.
"채무에 대하여 부인하시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안 그래도, 저번 주에 법원에 채무부인을 목적으로 소장 제출했습니다."
"음... 그렇군요. 그러시면, 접수증명원이나... 뭐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증명할 자료를 공유해 주실 수 있나요? 저도 보고를 해야 하니까요."
"그러시군요. 제가 문자로 사건번호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쪽 일은 잘 아실 테니, 사건 조회해 보시면 될 것 같군요."
"네. 알겠습니다."
"네. 늦은 시간에 실례 많았습니다."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에 머릿속에 '그래도 한 번은 만나봐야겠지?'라는 명령이 작게 들렸다.
"사장님!"
"네?"
"혹시 주말에 시간 괜찮으신가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끝내도 되는 거 아닌가요?"
"네. 그래도 한번 뵙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고객에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게 여러 가지 면에서 좋거든요. 불편하지 않으시면 잠깐 뵙고 소송 얘기도 하고 싶네요."
"네... 뭐 가볍게 만나는 건 상관없죠. 그런데 굳이 주말에 볼 필요 있나요? 시간 괜찮으시면 내일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아! 그러신가요? 시간하고 장소는 어떻게 할까요?"
"오전에 어떠신가요?"
"오전은 조금 힘들고... 제가 처리할 다른 일이 있어서요. 오후는 어려우신가요?"
"뭐... 괜찮습니다만, 모양이 좀 안 서겠네요. 요즘 물량이 많아서 저도 배송을 해야 돼서요. 얘기가 길어지는 게 아니면 외부에서 만나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네. 상관없습니다."
"그럼, 배송 중에 잠깐 뵙는 걸로 하시죠.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전역장교는 오후 2시쯤에 배송하고 있을 아파트 단지명을 알려 주면서 배송일정에 따라 시간이 유동적이 된다는 점을 계속 강조한다.
"네. 저는 오후에 다른 일정이 없어서 한참 기다려도 상관없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천천히 일 보시고 연락 주세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전역장교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 생각한다. 그래... 사무실에만 있는 것보다는 밖에 나가는 게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약속도 오후로 미뤘으니, 현지에서 바로 퇴근하면 토요일과 이어지는 자유시간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다.
어느덧 하루가 지나고 똑같은 하루가 재생되고 있다. 흑백이 조화롭게 장식된 사무실에서 반복되는 업무를 처리하면서 오후가 다가오길 기다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이다.
'일단, 약속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연락을 기다리는 게 좋겠지?'
업무시스템의 달력에 외근 일정과 현지 퇴근임을 입력하고 가방을 주섬주섬 챙긴다.
"어디가?"
쉼표 없는 인간이다. 어딘가를 다녀온 듯싶은데, 표정을 보아하니 실적문제로 또 한 번 혼난 듯싶다.
"어제 맡은 신규업무 때문에 외근 나갑니다."
"확실히 해! 넌 지금 기본수당도 못 챙기는 실적이야!"
"네. 알겠습니다."
쉼표 없는 인간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지하철 역으로 향한다. 지하철 창문으로 검은 터널을 바라보고 있다. 항상 궁금하다. 도대체 지하철에 창문이 왜 있는지 말이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하철 역을 나와서 시계를 보니 1시 10분이다. 시간이 많다. 간단히 분식집에 들어가서 라면과 김밥으로 점심을 때운다. 시계를 보니 1시 30분이다. 시간이 많다. 가까운 커피숍에 들어가 에스프레소를 주문한다.
◤ 변호사가 처음으로 응시한 2차의 결과는 낙방이었다. 초시 때 낙방은 일반적이다. 게다가 변호사는 초시에서 과락은 면했다. 낙방에 대한 절망보다는 재시에서 합격할 수 있다는 희망이 더 큰 점수였다. 변호사는 불안하지만 희망이 있는 표정으로 나와 만났다. 거의 두 달을 못 봤던 얼굴이다.
"넌 무슨 사약을 돈 주고 사 먹냐?"
에스프레소를 먹고 있는 나를 보고 변호사가 물었다.
"진짜 커피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에스프레소지."
나는 웃으면서 답했다.
"시험 준비는 잘 돼 가?"
변호사의 질문에 나는 답하기 어려웠다. 거의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할까 생각 중이야."
변호사는 말이 없었다. 나도 말없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좀 야윈 것 같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냐?"
변호사는 갑자기 주제를 바꿨다.
"응. 밥은 먹지."
“제대로 밥 먹는 놈 얼굴이 왜 이러냐? 우리 오랜만에 저녁으로 고기나 구울까?"
"고기 좋지. 최근에 난 개종해서 돼지고기는 못 먹는다."
"돼지고기 못 먹으면 닭고기 먹어야겠네."
"개종 기념으로 내가 소고기 사마.”
시답잖은 농담이 오고 갔지만 서로의 얼굴에 웃음기는 전혀 없었다. 우리 둘은 그저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변호사는 아메리카노를 1/3 정도만 마셨을 뿐이지만, 나는 적은 양의 에스프레소를 거의 마신 상태였다.
종이컵 위에 손을 얹어 놓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는 게 맞을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하지만, 그래도...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나는 나하고 같은 꿈을 꾸는 친구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
나는 아무 말없이 커피를 비웠다. 변호사는 나에게 자신의 커피를 절반 정도 따라 주었다.
해가 지고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우리 사이에는 침묵만이 존재했다. 누가 봤으면 오늘 헤어지기로 한 연인들이 마지막을 기념하는 자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밥 먹으러 가자. 공부하려면 고기 먹고 힘내야지!”
나는 침묵을 애써 걷어내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너무나도 짧고 어중간한 대화 끝에 나는 다시 한번 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
2시 정각. 전역장교로부터 문자가 왔다.
'응? 아파트 놀이터에서 보자고?'
이상한 장소였지만 상관없었다. 전역장교가 만나자고 한 곳은 고급아파트 단지였다. 단지 안에서 차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전역장교는 고급아파트에 배송할 물건들을 모두 놀이터 근처의 공터에 내려놓고 작은 수레로 물건을 배송하고 있었다. 마침 다른 택배회사에서도 고급아파트 단지에 배송을 시작하고 있었다. 똑같이 놀이터 옆의 한편에 물건을 모두 내리고 수레로 배송을 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장식된 보도블록 위를 수레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지나간다.
"이런 곳에서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여기 커피 한잔 드세요."
전역장교는 전형적인 80년대 미남형의 얼굴이다. 각진 얼굴에 가발을 쓴 것과 같이 가지런하게 정돈된 머리가 인상적이다.
"괜찮습니다. 커피 잘 먹겠습니다."
놀이터 한 곳에 마련된 의자에 둘이 나란히 앉는다.
"채무를 부인하신다고요?"
거두절미하고 일 얘기를 시작했다.
"네. 혹시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해 잘 아시나요?"
"잘 모릅니다."
"네. 그럼 간단히 배경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꽤 오래전에 법이 바뀌면서 가맹점주들은 10년간 가맹점 계약을 갱신할 수 있게 되었죠. 물론, 무조건 갱신은 아니고 몇 가지 예외가 있긴 합니다. 예외 중에 하나가 가맹점주가 가맹계약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죠. 저도 프랜차이즈를 10년 동안 하면서 매년 추가 가맹계약금을 지급했습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죠. 그런데 계약서에는 매년 지급하는 가맹계약금 외 별도로 300만 원을 지급하게 돼 있는데, 나중에 계약이 끝나는 시점에 돌려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일종의 보증금 성격이라는 게 관리직원의 설명이었죠. 이자는 없다고 해도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지급했죠. 그때는 가맹점을 계속하는 게 생계유지를 위해 필요하기도 했구요. 그렇게 10년 동안 3천만 원을 지급했습니다.”
전역장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10년이 되는 시점에서 회사에서 계약을 끝내자고 통보를 해왔어요.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논쟁거리는 많지만, 저도 마침 지금 하고 있는 택배 대리점을 개설할 생각도 있고 해서 회사에는 알았다고 했죠. 그리고 3천만 원을 돌려 달라고 했습니다. 관리직원은 이번 달에 회사하고 정산할 금액 중에 3천만 원을 제외하고 입금하라고 하더군요. 그럼 내부적으로 처리해서 마무리된다고요. 저도 그게 편할 것 같아서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정도 있었나요? 갑자기 저한테 3천만 원을 입금하라고 회사에서 통보가 왔습니다. 저는 회사에 전화해서 그동안 관리직원이 설명했던 것들을 모두 얘기했죠. 그랬더니 회사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 관리직원이 자기가 관리하는 가맹점들로부터 10년간 3천만 원을 그렇게 빼돌렸데요. 그리고 얼마 전 회사를 그만두고 잠적했다고 합디다. 저는 회사에 따졌죠. 그게 내 잘못이냐고. 당신들이 직원 관리 잘못한 거 아니냐구요. 그랬더니 회사에서 한다는 말이, 계좌주가 개인이름으로 되어 있던 걸 왜 몰랐냐고 하더라구요. 이건 제 과실이 크다고 말입니다. 일단 회사에 3천만 원 입금하고 그 관리직원한테 소송해서 받으래요.
물론, 계좌주가 개인이름으로 되어 있던 건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고, 설령 제가 잘못했다고 해도 어떻게 100% 제 잘못이 됩니까? 그래서 저는 못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보증보험인지 뭔지 하는 회사에서 연락이 오고, 또 얼마 안 있어서 선생님이 저한테 연락하신 겁니다."
참, 딱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어떻게 그 많은 가맹점들이 하나같이 다 속을 수 있는지, 회사에서는 어떻게 한 명한테 10년 동안 같은 가맹점들을 관리하게 시킬 수 있었는지. 그 관리직원은 10년 동안 승진도 안 하고 부서 이동도 안 했단 말인지... 어쨌든 이제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잘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내용 정리해서 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대기업 상대로 소송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돈을 지키고자 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3천만 원 정도는 지금도 당장 줄 수 있습니다. 군 생활하는 동안 낭비하지는 않았거든요. 소송에서 이기지 못하더라도 언론에는 알릴 겁니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3천만 원... 언론... 사회... 뭔가 계속 커지는 기분이구만.'
맥락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기에 그냥 머리를 스쳐 지나가게 놔뒀다.
전역장교는 말을 이어갔다.
"당시에 그 직원에게 관리받았던 가맹점주들하고 연락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같이 소송하면 좀 더 유리하겠죠."
'그렇겠지. 걔 중에는 정말 목숨 걸고 소송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전역장교는 나에게 명함을 요청했고, 나는 가방을 뒤져 명함을 건네면서 생각했다.
'연락하지 말아라. 괜히 머리 아프기 싫다. '
어쨌든 간단하고 급하게 놀이터 미팅이 마무리되었다. 생각보다 너무 일찍 미팅이 끝난 탓에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다시 사무실로 복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거대한 고급아파트 단지 안을 헤매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애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태어나자마자 이런 곳에서 사는 너는 행복한 놈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무슨 노래를 들을지 고민한다. 애기 우는 소리가 멀어지고, 어딘가에서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까 잠깐 지나쳤던 다른 택배회사의 이름 모를 직원이었다.
'시끄럽군.'
약간 짜증이 나서 인상이 찌푸려지려는 찰나였다.
"어이! 거기 택배!"
이름 모를 직원과 나는 동시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택배!"
아파트 경비원인 것 같다.
"거기 택배! 당신 뭐야? 왜 시끄럽게 수레를 끌고 다녀. 조심히 들고 다녀야지. 애기 다 깨잖아! 사람이 못 배웠어도 교양은 있어야지!"
순간 나는 경직됐다. 사람이 사람에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이름 모를 직원의 볼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분노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저도 대학 나왔거든요!"
아... 이 무슨 비참한 저항인가.
이내 경비원은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없이 돌아섰고, 이름 모를 직원은 수레를 들고 놀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혼자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