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쟁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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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진짜 망했다. 어제의 그 사건은 나의 머리를 완전 휘저어 놓았다. 채무자 회사의 대리가 나를 무시하는 듯 비꼬는 말투로 말을 해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어젯밤의 일이 순서 없이 마구 뒤섞여 있다. 기억들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려고 몸부림친다. 소용돌이 마냥 내 머리를 휘젓는다. 숟가락으로 사정없이 휘저어 놓은 아이스크림 같이 뇌가 녹아 버릴 것 같다.
“아니...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운송비가 물건보다 비싸요. 이게 말이 되요?”
평상시 같으면 뭐라고 답했을까. 아무렴 어떤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머릿속이 모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같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리님. 만약에 나한테 정말 필요한 볼펜이 한 자루 있는데, 500원이에요. 그런데 그게 인터넷에서 밖에 안 팔아요. 난 두 개도 필요 없고 딱 하나만 있으면 되거든요? 그런데 배송료가 2500원이래요. 어떻게 하실래요? 그거 안사면 정말 큰일 나는데 말입니다.”
건방진 표정의 대리가 나를 노려보듯 바라보면 코웃음을 친다.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건 볼펜 파는 업체가 잘못한 거지. 그런 걸 누가 사? 그러니까 그런 조그만 회사들이 막 망하는 거야. 시장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런 비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하니까 망하는 거라구.”
‘나이 어린 게 무슨 말이 이렇게 짧아?”
기분이 상한다. 머릿속은 녹아 버린 아이스크림 같다.
“그런데 처음에 견적 받으셨을 거 아니에요? 운송비도 모르고 일 시키지는 않았을 거고. 결재해 준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나는 솔직히 놀라고 있었다. 채무자들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 본 적이 있었나 싶다. 머릿속은 흐리멍덩한데 신경은 유난히 날카롭다. 그리고 한껏 날이 선 나의 신경은 찰나의 순간에 스쳐 지나간 채무자 회사 대리의 당혹한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결재 안 받으셨죠?”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스쳐 지나갔던 당혹감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채무자 회사 대리의 얼굴에 내리 꽂힌다.
“누구한테 얘기하면 일이 풀릴까요? 팀장님? 상무님? 아니... 대표님 정도는 돼야 무려 2억이 넘는 운송료를 책임져 주실 수 있을까요? 겨우 5백만 원짜리 물건 운송하면서 2억이 넘는 운송비를 지급하는 어이없는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
채무자 회사의 대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마도 중간에 뭔가 일이 잘못되었나 보죠? 원래 계획했던 것들이 틀어졌다던가, 아니면 딴생각하다가 일 처리할 시기를 놓쳤다던가. 그러다 눈앞에 막상 일이 닥치니, 뭐 어쩌겠습니까. 일단 수습부터 해야죠. 계약서야 알아서 대강 썼을 테고... 기타 서류들은 아예 작성을 안 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겠네요. 어차피 운송회사에서야 대리님한테만 연락했을 테니,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었을 테구요. 그런데 어찌할까요? 이제는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채무자 회사의 대리는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평상시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을 했다.
“지금 큰 소리 칠 사람은 우리 고객입니다. 큰 소리라는 건 정당한 채권자가 부당한 채무자에게나 할 수 있는 거란 말이에요.”
매우 천천히, 그러나 큰 목소리로, 단어 사이사이를 힘주어 끊으며 말했다. 채무자 회사의 대리는 누가 봐도 압박감을 느끼며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마치 큰 사고를 친 어린아이가 잘못을 숨길까 아니면 솔직하게 말할까를 놓고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심하고 있다.
‘한번 더 찍어 누를까? 너무 힘을 줘서 그냥 터져 버리는 건 아니겠지?’
다음 행동을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채무자 회사의 대리가 갑자기 나를 쳐다보다 말한다.
“잠깐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내 시야를 벗어난 곳으로 가서 길게 통화한다. 10분? 아니면 20분? 잘 모르겠다. 그냥 멍하니 앉아서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느끼고 있었다.
“저... 다음 주까지 지급하겠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채무자 회사의 대리가 진 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누군가에게 엄청 혼나긴 했나 보다.
“감사합니다. 약속 지켜 주세요.”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하면서 일어나 등을 돌린다. 작은 소리가 들릴 듯 안 들릴 듯 들린다.
“씨발! 미친 빚쟁이 새끼.”
아이스크림이 눈을 가린다. 귀도 가린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야. 너 몇 살이냐?
“네?”
“나이도 어린 새끼가 어디서 쓰레기 같은 것만 배워 가지고...”
“네?”
“다음 주까지 입금해라.”
등을 돌리면서 말을 잇는다.
“돈 받으러 온 사람도 빚쟁이지만, 돈 갚아야 할 사람도 빚쟁이다.”
건물 밖을 나오면서 괜히 통쾌했다. 알 수 없는 쾌감. 어제의 혼란스러움은 마치 담배연기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간 것 같았다. 순간 가는 소리가 들릴 듯 안 들릴 듯 들린다.
“좋냐?”
뭐지? 나 지금 환청 듣나? 몽롱한 정신이 갑자기 날카롭게 곤두선다.
“그게 그렇게 좋아?”
이어서 등 귀에서 큰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린다. 환청은 아닌가 보다.
너무나도 통쾌한 감정을 가슴 깊이 음미하면서 번잡한 길 위를 걷고 있었다. 감정을 너무 음미했나? 어느덧 쓰디쓴 뒷맛이 이어진다.
‘미친 녀석...’
어젯밤에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냥 이대로 길바닥에 누워 잠자고 싶다.
전화가 온다. 학원 강사다. 어제 밤에 전화를 한 것에 대한 답신인가 보다.
“여보세요?”
“어쩐 일로 네가 전화를 다 했냐? 어제는 수업 중이라 전화를 못 받았다.”
“어... 어제 좀 급한 일이 있어서 전화했었어. 지금은 잘 해결됐고.”
“그래? 그려... 그럼 잘 들어가라. 나중에 보자.”
난 친구가 많지 않았다. 숫기가 없다든가 혼자 있는 것을 유독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유별나게 친화력이 떨어졌다. 그 와중에 정말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바로 이들이다.
물론, 모든 면에 있어서 솔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서로를 비교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무시하고 때로는 시기하기도 했지만 친구는 친구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친구의 단점과 허물은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고, 친구의 장점은 내가 배울 것이 되었다. 마음 깊숙이 무언가를 숨기고 동굴 속으로 숨으려 노력할 때도 항상 먼저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 역시 이 친구들이었다. 정말 고마운 녀석들이다. 나에게 뭐가 고민이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저 곁에서 말도 안 되는 농담이나 던지며 내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 줬다. 정말 고맙다.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지금 뭐 하냐?”
“아니, 뭐 할 게 있어서 학원 나와 있긴 한데, 방금 전에 다 끝났어.”
“그래? 잘됐다. 나 너네 학원에서 10분 정도 거리인데, 같이 밥이나 먹자.”
“오! 좋다. 안 그래도 혼자 밥 먹게 생겼었는데. 잘됐네.”
“10분 뒤에 보자.”
전화를 끊고 좁은 골목 사이로 들어가 담배를 한대 피우며 생각한다. 학원 강사와 단 둘이 만났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모두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시간을 만들기 쉽지 않다. 정말 띄엄띄엄 그것도 4명에서 동시에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세상을 구하느라 소비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부지런히 걸었다. 이윽고 학원 강사의 일터 앞에 도착했다.
학원은 신식 건물 한 동을 통째 쓰고 있었다. 깔끔하고 멋져 보였다. 건물 상층부에는 학원을 대표하는 4명의 강사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담은 현수막이 걸려있다. 4명 중 한 명은 친구였다.
학원 강사의 문자가 왔다. ‘도착했냐? 지금 엘리베이터 탄다. 1분.’
우리 네 명은 고등학교 때부터 항상 몰려다녔었다. 나와 변호사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단짝이었고, 중학교 때 대기업 회사원이, 고등학교 때 학원 강사가 합류하면서 나름의 모임이 형성됐다.
어리다면 어린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원 강사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시험을 잘 봐도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하고, 시험을 망쳐도 그냥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갔다. 더 재미있는 건 학원 강사의 부모님들 역시 같은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수능을 망쳐서 원래의 실력보다 못한 대학에 진학하게 됐을 때에도 학원 강사의 부모님은 수능도 끝나고 대학도 붙었는데 기분 좋게 다 같이 해외여행이나 가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학원 강사 역시 아무런 타격도 없는 듯 매일같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해외여행 간다고 자랑하며 나다녔다. 나는 그런 성격의 학원 강사가 부러웠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아냐. 나도 방금 왔어. 뭐 먹을까?”
“여기 맛있는 김치찌개 집 있다. 거기 가자.”
학원 강사는 반걸음 정도 앞서 나를 안내했고, 나는 부지런히 뒤를 밟았다. 이윽고 식당에 도착해서 음식을 주문한다. 그저 얼굴을 보고 싶어 만나자고 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궁금하다. 변호사나 대기업 회사원처럼 학원 강사 역시 행복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진다. 주방을 바라보니 아직 음식이 나오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였다. 친구들끼리 뜸을 들이는 것도 예의는 아닐 것.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바로 질문한다.
“야. 너 행복하냐?”
“이게 실성했나. 남의 회사 앞에까지 찾아와서 뭔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이야?”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질문이긴 했다. 하지만 난 정말 궁금했다. 학원 강사는 행복한지.
“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답해라. 행복하냐?”
“미친놈... 뭐 물어보니 말하지만, 당연히 행복하지. 직장이 좀 불안정한 맛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벌이도 괜찮고, 집 있겠다, 차 있겠다, 결혼도 하고 애들도 있겠다, 뭐 부족한 거 없잖아? 그럼 됐지 뭐.”
예의 그 특유한 초월적 태도. 나는 또다시 이 녀석이 부러웠다.
“집에 가면 와이프가 구박하거나 하지 않아? 일 늦게 끝나고 피곤한 상태로 집에 들어갔는데 잔소리 들으면 짜증 나지 않냐?”
학원 강사는 내가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를 유심히 살피다 답한다.
“당연히 구박당하지. 혼나기도 많이 혼나고. 내가 직업 특성상 밤에 늦게 들어가고... 가끔 다른 선생님들하고 술도 한잔 하니까. 그렇다고 뭐 주말에는 한가하냐? 더 바쁘지. 원래 학원 강사라는 직업이 남들 쉴 때 더 바쁘잖아. 뭐... 그러다 보니 살림과 육아는 오롯이 와이프 몫이 되잖아. 너 같으면 대학까지 나와서 살림만 하고 싶겠냐?”
“그래서 어떻게 해? 일도 피곤하고, 미래도 불투명한데 잔소리 듣고, 구박당하면 싫지 않냐?”
“너는 구박당해서 행복해졌다는 사람 봤냐? 당연히 싫지.”
“그런데 왜 행복해?”
학원 강사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한참을 뜸 들이다 느릿느릿 답을 한다.
“글쎄다... 나는 그저... 그냥... 아마도...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갖지 못한 것에 미련을 갖지 않기 때문일 거야.”
맥 빠지는 답이다.
“그래... 맞는 말이다.”
마침 음식이 나왔기에 나는 더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학원 강사는 내 자리에 수저를 놓아주었고, 나는 아무 말없이 학원 강사에게 물을 건네어주었다.
본인이 행복하다면야 다행이지만 딱히 호응해 주고 싶은 기분은 아니다. 뭔가 비어 있는 기분이다. 갑자기 이솝우화의 여우가 생각난다. 그리고 8류의 말도 생각난다.
‘먹을 수 없는 포도 때문에 자신에게 가혹해지는 것보다 다른 과일을 찾아보는 게 행복해지는 길인가?’
짧은 침묵을 깨면서 학원강사가 입을 연다.
“이것도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행복은 개개인 모두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라고 생각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할 수 있지만.”
“그렇겠지...”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듯 작게 말하며 밥을 먹는다. 학원 강사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묻는다.
“무슨 고민 있냐?”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고민이다. 아무 생각 없이 답한다.
“내가 무슨 고민이 있겠냐. 그냥 하루 무사히 넘기는 것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는 놈인데.”
아무 생각 없는 나의 답에 학원 강사가 다시 묻는다.
“네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만약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한다면 너는 왜 행복하지 않냐?”
“응?”
나는 예상치 못한 학원 강사의 질문에 그를 바라봤다.
“아니... 네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닌 건 알겠는데... 그게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왜 행복하지 않냐고. 고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시간의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겨왔는데.”
나는 짧게 생각하다가 답한다.
“미래가 불안하잖아. 내일도, 내년도, 10년 후에도 큰 걱정 없이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그래.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왜 10년 후의 걱정 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포기하는 거야?”
티슈로 입 주변을 닦으며 약간은 식상하다는 투로 답한다.
“그러니까, 왜 아직 생기지도 않은 미래의 일로 걱정하고, 해결할 수 없는 과거의 일 때문에 걱정하냐는 거잖아?”
학원 강사는 특별한 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밥을 먹는다. 혹시라도 내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좋은 친구이고, 열심히 살아온 녀석이다. 내가 학원 강사의 생각에 어떠한 가치를 두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학원 강사는 충분히 나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미안하다. 비꼬려고 했던 건 아냐.”
나는 툭 던지듯 미안함을 표현한다. 학원 강사는 잠깐 가만히 있다가 답한다.
“괜찮아."
어색함을 반찬 삼아 밥을 모두 먹은 나는 계산대로 가며 지갑을 꺼냈다. 하지만 학원 강사가 나를 가로막으며 말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사야지. 커피 사라.”
커피를 사 들고 나올 때까지 우리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학원 강사는 손짓으로 근처 공원을 가리켰고 나는 아무 말없이 공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
“행복이라는 게 도대체 뭐 길래 사람들이 그토록 목을 매는 걸까?”
오랜 침묵을 깨고 학원 강사가 말을 꺼냈다.
“글쎄다...”
나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만지작 거리다 말을 이어간다.
“너는 행복하다고 말했잖아.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놈이 어떤 건지는 알 거 아냐?”
학원 강사가 커피 한 모금을 크게 마신 후 말한다.
“나도 잘 몰라. 하지만 그냥 가끔 이런 생각은 해.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계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는 속으로 학원 강사의 말을 되뇌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학원 강사의 말은 현재에 대한 만족감이다. 물론 ‘행복’이라는 주관적인 개념을 가지고 뭐가 맞고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학원 강사의 생각은 너무 현실에만 안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이루고 싶은 것을 모두 이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학원 강사는 단 한 번도 학원 강사가 꿈인 적이 없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내 앞날이 지금과 같다면 정말 좋을 거야. 아이들은 좋은 교육을 받을 거고, 나와 와이프의 노후도 큰 걱정 없겠지. 아이들이 다 커서 독립을 하면 우리 부부는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피해 어디 멀리 휴양지로 떠날 수 있을 거야. 돈 걱정 없이. 그러다가 지루해지면 다시 돌아와서 자식들을 보고 손주들을 보겠지.”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늙는 걸 피할 수는 없겠지만 어디 크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혹시라도 어디가 아프다 해도 돈이 없어서 못 고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나는 이 정도면 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걸으면 묻는다.
“무언가를 남기고 싶지는 않아?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되었든,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 주는 무언가가 되었든...”
학원 강사가 공원 밖의 흡연구역을 손으로 가리키며 방향을 살짝 바꾸며 말한다.
“글쎄다... 짧은 인생인데 하고 싶은 일 해 보고, 즐거운 일 경험하며 살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잠깐 고민을 한다. 학원 강사에게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크지 않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건 10년 뒤에서 지금처럼 살고 있는 내 모습일 것이다. 학원 강사는 현재에 만족하기 때문에 10년 뒤에도 지금과 같다면 좋겠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10년 뒤에도 지금처럼 돈 많은 사람들 돈을 받아주는 일을 하고 있을까 두렵다. 내가 참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내 모습을 찾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그런 영웅적인 모습을 말이다.
“세상에는 부당한 일이 참 많아.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불행해. 시작부터가 남들과 다른 사람도 있고,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평범한 혜택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아. 그런 것들을 주변에 두고 못 본 체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잖아?”
학원 강사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친구야. 행복이 뭔지는 몰라도, 이건 확실해. 행복은 절대적이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아.”
나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학원 강사가 말을 이어간다.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행복해지지는 않을 거야. 어쩌면 나처럼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일지도 몰라. 만약 아까 네가 ‘너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자랑스럽냐’라고 물었던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큰 가치나 사명감을 느끼냐’라고 물었다면 나는 쉽게 답하지 못했을 거야. 원했던 삶과는 조금 다르지만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제법 풍족해진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너는 ‘행복하냐’고 물었어. 둘은 서로 다른 질문이라고 생각해.”
학원 강사가 잠깐 말을 끊는다. 무언가 짧게 생각하는 듯하다 다시 말을 이어간다.
“지금... 나는 갖고 싶은 것들을 모두 가진 상태야. 당연히 행복해야지. 가족들이 갖고 싶다는 것 모두 사줄 수 있고, 가족들이 즐기고 싶은 것 마음껏 즐기게 할 수 있는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나 만족스러워.”
나는 학원 강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 시선을 의식한 학원 강사가 나를 곁눈질로 바라본 후 땅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가끔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학생들이 찾아와서 고맙다는 말을 할 때면 나름 직업적 자긍심을 느끼기도 해. 그럴 때면 돈 없는 아이들을 위한 무상교육을 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아. 안타깝고 불쌍하지만... 이름 모를 누군가를 위해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희생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거든. 더 큰 무언가를 쫓아갈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러려면 나에게 가장 소중한 누군가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어.”
◤ 2년 전. 우리 넷은 추석 연휴 끝자락에 오랜만의 만남을 가졌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당시 대화의 95%는 대기업 회사원이 이끌어 갔었다. 최근 같이 일하게 된 신입에 대한 불만이 주제였다.
“주변에서 나한테 꼰대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난 솔직히 요즘 애들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직원이 하나 있는데, 매일 같이 우는 소리만 해요. 회사에서는 매일 의미 없는 일만 하는 것 같다, 게다가 급여는 너무 적다. 그 적은 급여에서 학자금 대출금 나가고, 월세 나가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야, 그런데 웃기는 게 뭔지 아냐? 일단 그 신입, 부모님 댁이 서울이야. 그런데 그냥 혼자 사는 낭만을 누리고 싶다고 자취한데. 그리고 매일 돈 없다고 하면서 아침마다 꼭 겁나게 비싼 커피를 손에 들고 출근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뭔지 아냐? 이 비싼 커피를 마시면서 일과를 시작하는 게 하루를 버티게 해 주는 원동력이라는 거야. 너희들은 이게 이해가 되냐? 아니, 자기가 좋아서 그렇게 하는 거면 불만을 말던가... 이건 뭐,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무슨 불만이 이리도 많은지. 게다가 일은 더럽게 못해요.”
“미친놈. 네 말만 들으면 너네 회사에 정상인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것 같다.”
학원 강사가 유쾌하게 웃으며 대기업 회사원의 말을 받아줬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 놈의 회사는 어떻게 된 게 죄다 병신이야.”
“병신은 너지 병신아. 너 애꾸만 있는 나라에 눈 2개 있는 사람이 가면 왕 될 것 같냐? 장애인 되는 거야 병신아.”
“우하하하하! 명언이다. 그런데, 걔는 왜 그런 것 같냐?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는데 왜 이리 불만이 많은 거냐?”
조용히 듣기만 하던 변호사가 말한다.
“뭐라도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정작 본인이 만족할 만한 것을 못 찾아서 그렇겠지.”
“뭘 못 찾아? 우리가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와서 일 시켰냐? 본인이 선택한 거잖아?”
“선택한 대로 됐다고 해서 불만이 없겠냐? 넌 군대에서 원하는 바닥에 삽질하면 ‘우리나라 군대는 참 좋다’하고 생각했을 것 같냐? 단지 시행착오를 거치는 중인 거야. 본인이 정말로 만족할 수 있는 걸 찾아가는 시행착오.” ◢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지만 나는 뭘까? 나도 무언가에 만족하려고 애쓰지만...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사는 걸까? 이 나이가 되도록 내가 어떤 것에서 만족할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 만약... 그게 무언지를 찾는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학원강사가 나를 바라보면 말한다.
“너는 스스로에게 답을 할 수 있어야 돼. 네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쫓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현재 가진 것에 집중하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한지. 만약 전자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다면... 그것 덕분에 행복해질 수 있을지가 중요한 것은 아닐 거야.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어떠한 것들이 가치 있을지를 찾아야 하겠지. 비록... 그것 때문에 행복을 느낄 기회를 놓치더라도 말이야. 가치를 좇던, 행복을 쫓던 그건 오로지 너의 선택이야.”
어느덧 흡연구역에 다다랐다. 나는 담배를 불을 붙이며 말한다.
“도대체 뭐가 가치 있는 일일까?”
학원 강사가 커피를 마시며 말을 한다.
“우리 부모님은 정말 좋은 분들이시지만 많이 배운 분들은 아니야. 학창 시절에 문제집 한 권 제대로 풀어 본 적 없으신 분들이야. 그래도 실망 안 하시고 본인 자식에게는 엄청난 돈과 시간을 투자하셨어. 열심히 살아오신 덕에 그분들 아들인 나는 문제집하고 수험 안내서만 10권을 넘게 펴냈지.”
학원 강사는 본인의 사진이 걸려 있는 학원 건물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결과가 저거야.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던 그분들의 삶은 행복했을까? 나는 모르겠어. 하지만 부모님들은 본인들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 당신네들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투자를 했다고 생각하실 거야. 그리고... 그 분들의 삶이 행복한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을 거야. 아무리 힘들고 부족한 게 많았다고 해도 충분히 견딜 가치가 있었을 테니까. 어쩌면 작게라도 느낄 수 있었던 행복을 포기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테니까.”
나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작게 답한다.
“그러셨겠지.”
행복과 가치... 그 둘은 어떻게 다른 것이고, 다르다면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학원 강사는 분명 행복하다고는 하지만 본인의 삶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학원 강사의 부모님은 거친 현실을 묵묵히 견뎌내고 자식을 유명한 강사로 키워낸 것에 큰 가치를 두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학원 강사의 부모님들은 자식이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분들은 본인들이 생각하는 가장 큰 가치를 실행하는 것만으로도 행복감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 삶을 사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지금 당장 부족한 것이 무엇이기에 이렇게도 주제 없는 고민을 계속하는 걸까? 끼니 걱정? 그런 건 안 한다. 가족 걱정? 그런 것 역시 없다. 미래 걱정? 앞날이 불투명한 것은 맞지만 그에 대한 불만 역시 크게 가져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없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때때로 갖고 싶은 물건을 찾아 인터넷을 방랑하다 결국에 포기하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못 사는 것이 아니라 안 사는 것이다.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그 외에도 수많은 것들을 소유하거나 실행하기를 주저하지만 역시나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 나에게는 딱히 부족한 것이 없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오직 하나인 것 같다.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나는 어떤 가치를 위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얼마만큼 포기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