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글/빚쟁이

빚쟁이 (8)

세발너구리 2024. 3. 23.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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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어떻게 됐어?”

어쩌면 내 인생을 뒤흔들 수 있는 고민을 하면서 사무실에 들어섰다. 하지만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쉼표 없는 인간의 일갈이 날아온다. 바로 직전까지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쉼표 없는 인간은 나에게 이 세상 무엇보다도 효과 좋은 각성제인 것 같다.

“다음 주까지 전부 입금한다고 합니다.”

쉼표 없는 인간의 입꼬리가 순간 꿈틀 한다.

“좋아!”

쉼표 없는 인간은 엄청 호탕한 목소리로 한마디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빙그레 웃는다. 왠지 정감 있다.

 

“뭘 실실 웃냐?”

8류가 나에게 다가오면 히죽거리며 묻는다.

“어... 형. 오랜만이네.”

“자식이 말이야. 형님 얼굴이 안 보이면 전화도 하고, 안부도 묻고 해야지. 넌 애가 왜 그렇게 차갑냐?”

나는 웃으면서 답한다.

“항상 마음속으로 생각하다 보니 항상 곁에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지. 담배 폈어?”

“가자.”

 

8류와 나는 근처 편의점에서 커피를 한 캔씩 사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요즘은 좀 어때?”

“나야 뭐... 항상 그렇지. 형은?”

“모르겠다. 인생이 왜 이리 무미건조하냐. 온 세상이 흑백이구만.”

우리 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류와 나는 분명 가까운 사이지만 뭔가 섞이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뭔가 깊은 말을 논할 사이는 아니다.

“너는 좀 지낼만하냐?”

“나야 뭐... 그냥 항상 그렇지.”

똑같은 질문과 답변이 한 번 더 돌아온다. 분명히 먼 사이는 아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하여 서로의 대화가 단절된 듯한 기분이다.

“이제는 담배 맛도 쓰네. 들어가자.”

“나 잠깐 전화 한 통화만 하고 들어갈게. 형 먼저 들어가.”

8류는 웃으며 나의 어깨를 툭 치고 사무실로 향한다.

‘뭐가 이리 어색한 건지...’

담배 하나를 다시 꺼내 입에 물려고 하는 순간 저기 멀리서 6류가 다가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아는 채 한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지난번에 연락한다고 해 놓고 전화 못해서 미안하다. 요즘 좀 정신이 없어서.”

“아뇨. 괜찮아요.”

6류가 담배를 꺼내 물며 상투적인 말을 꺼낸다.

“요즘 잘 지내냐?”

6류와 대화를 하는 것이 낯선 광경은 아니지만, 간혹 6류에게서도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낀다. 하지만 6류와 8류의 이질감은 결이 다르다.

“그냥... 고민이 많아요.”

6류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이며 말한다.

“무슨 고민인데?”

나는 주저하다 답한다.

“그냥... 내 인생이 가치가 있는 인생인지,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6류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가치. 좋은 말이지. 그런데, 너는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면 행복해질 것 같냐?”

“네?”

6류의 말에 살짝 놀란다. 학원 강사와 가치와 행복에 대해 말한 직후에 다시 한번 두 단어가 연관된 대화를 한다는 것에 놀란다.

“글쎄요... 그런데 가치 있는 일과 행복한 일이 같나요?”

6류가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짓더니 꽤 큰 목소리로 답한다.

“당연하지! 가치추구의 결과가 곧 행복이야!”

행복과 가치추구를 구분했던 학원 강사와의 대화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럼 부장님은 가치 있는 일을 하실 때 행복해요?”

“당연하지.”

살짝 냉소적인 느낌이 나는 원래의 목소리로 6류가 답한다.

“그럼...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가치를 느끼세요?”

“가끔? 너나 나나 뭐 그리 다르겠냐. 네가 느끼기에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일들이라면 나도 그렇게 느낄 거야.”

잠깐 망설이다 묻는다.

“그럼... 왜 그런 일만 하지는 않으세요?”

6류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며 내려 보듯이 나를 바라보면 말한다.

“굶어 죽기 딱 좋잖아. 나도 살아야지. 이제는 좀 살만하긴 하지만...”

“네...”

6류가 담배를 끄며 말한다.

“어쩌다 보니 돈이 최고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되었지만, 실상 먹고사는 문제 해결되면 딱히 그렇지도 않을 거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에 인간미 넘치는 철학과 문학이 발전했던 이유들이 뭐겠냐? 딱히 위대한 일을 하고 싶다 이런 건 아니지만, 죽을 때 ‘분에 넘치게 잘 살았다’라는 생각은 하고 죽어야지.”

조금은 조용한 목소리로, 어쩌면 기가 죽은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저도 그럴 수 있을까요?”

6류가 입가에 웃음을 띤 채로 말한다.

“당연하지.”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인다. 6류와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6류는 나를 바라보더니 자신도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인다.

“너 지금까지 몇 년이나 일했지? 20년은 안될 거 아니야. 잘 생각해 봐. 네가 앞으로 일해야 할 기간이 몇 년이나 남았는지. 아마 지금까지 일했던 기간보다 더 많은 기간을 일해야 할 거다. 아직 중간도 오지 못한 거야. 그동안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생각해. 남은 시간 동안 충분히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어.” 

 



퇴근길의 머리가 무겁다.

가치와 행복. 양자의 관계를 해석하는 두 명의 다른 의견. 무엇이 옳을까? 가족의 소소한 행복을 지키는 것 택했던 대기업 회사원은 결국에 행복할까?

 

갑자기 생각난 대기업 회사원... 어제 이후로 연락을 못해 봤다. 전화나 해 보자.

긴 신호음 뒤에 익숙한 대기업 회사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어이. 어젯밤에 잘 주무셨는가?”

나는 최대한 평상시와 같은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말을 꺼냈다.

“정신 나간 놈. 너 같으면 그렇게 설치다가 집에 오면 바로 잠들겠냐? 10분도 못 잤다.”

대기업 회사원의 말투가 나쁘지 않다.

“그러길래 왜 시키지도 않은 꼬장을 부리고 그러냐?”

“내가 니 종이냐? 시킨다고 하고, 하지 말라고 안 하게?”

“야 이 미친놈아. 그럼 내가 얌전히 있으라고 해서 그 꼬장을 부렸냐?”

“뭐 이 새끼야? 형님은 이 세상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데 너는 그걸 고작 꼬장으로 치부하냐?”

우리 둘은 민감한 사안을 유치한 논쟁의 대상으로 만들며 통화를 이어갔다.

“걱정돼서 전화한 내가 병신이다.”

“아이구. 걱정하셨어요? 그래서 이제야 전화했어요? 나 같았으면 집 앞에서 기다렸다가 출근할 때 택시 태워서 에스코트까지 해준다.”

“하... 내가 오늘 진짜 어이없는 인간을 만났는데, 여기 그 보다 더한 놈이 있네.”

괜한 걱정이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너무나 밝은 대기업 회사원의 목소리가 오히려 걱정을 키운다. 왠지 진지한 대화를 피하려고 하는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기업 회사원의 대화 중간을 치고 들어가며 말한다.

“그래서, 제수씨한테는 잘 말했냐?”

대기업 회사원은 꽤 긴 시간 동안 침묵한다.

“그걸 어떻게 말하냐. 그래도 네가 잘 말해줘서 특별히 문제없이 넘겼다. 덕분에 난 이른 밤에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잠든 사람이 되긴 했지만.”

갑자기 목소리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비록 민감한 주제라고 하여도 유희의 대상으로 만들면 한결 수월하게 대할 수 있다. 마치 절대 권력자를 풍자하며 그 시대를 견디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한번 현실의 무거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려고?”

“뭘 어떻게 해. 이 악물고 버텨야지.”

대기업 회사원은 길게 한숨을 쉬며 한동안 침묵을 유지한다.

“어제 그러고 집에 들어와서 애들 자는 모습 보니까 정신이 번뜩 들더라. 솔직히 내 마누라가 얼마냐 예쁘냐? 우리 마눌님은 과부가 된다 해도 돈 많은 놈들이 줄을 설 테니, 걱정도 안 된다. 그런데, 우리 애들은... 아빠 없는 자식들 되는 거 아냐.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남의 피가 흐르는 애들을 친자식처럼 대할 수 있을까 싶다.”

애들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애들을 위해 감당하기 힘든 결과를 온몸으로 받아낸다. 아빠라는 직업... 역시 나 같은 위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화해 줘서 고맙다.”

대기업 회사원이 내가 잠깐 생각하는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 말을 꺼낸다. 나는 아무런 연산 없이 반사적으로 답한다.

“잠깐 볼까?”

“걱정되냐?”

나는 긍정의 뜻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걱정 마라. 예쁜 내 새끼들, 아빠 없이 키우게 하진 않을 거다.”

“그래.”

“빠른 시일 내에 한번 더 보자.”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전화 끊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생각한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렇게 죄책감 느끼는 것도 너 답고, 그렇게 다시 일어서는 것도 너답다. 너 같이 멋진 녀석이 나 같은 사람하고 친구 해 줘서 고맙다.’

 



새로운 아침이다. 잠들어 있는 영혼에게 회사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로 담배만 한 것이 없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는 순간 출근하는 14류를 발견한다. 14류는 예의 다정한 웃음으로 나에게 다가오며 인사한다.

“형!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그러게. 요즘 이상하게 마주치질 않네.”

“형. 아직 시간 괜찮죠? 저 목마른데 음료수 하나만 사주세요.”

“그래.”

14류와 나는 편의점에서 캔음료를 하나씩 사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바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 좀 줄여요. 그러다 제 명 다 못살겠네.”

“너가 잘 모르는 게 있는데, 나는 사실 담배를 피우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거야.”

“네?”

14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뭐... 그런 게 있다.”

“세상 구하는 건 좋은데, 좀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안 주는 방법으로 구하면 안돼요?”

14류는 약간의 익살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구박하듯이 말한다. 나는 약간은 멋쩍은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담배를 계속 피운다.

“요즘 좀 어때?”

“저야 뭐... 항상 똑같죠. 그냥 채무자들 만나고, 의뢰인들 만나고. 뭐 별 것 없어요. 그래도 정말 좋지 않아요? 이렇게 또 하루를 무탈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게요.”

문득 궁금증이 들어 말한다.

“야. 우리가 그래도 서로 알고 지낸 지 제법 됐잖냐. 그런데, 너는 항상 이렇게 즐겁냐? 뭐 힘들어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는데 말이야.”

14류가 웃으며 말한다.

“제가 조금 사고력이 떨어져요. 헤헤.”

그래.. 넌 마냥 즐거운가 보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 정말 힘든 일이 있었거든요. 형하고 거리를 두려는 건 아니지만, 형한테 조차 말할 수 없는 일이에요. 이해해 줘요.”

14류가 나한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는 것에 살짝 놀랐지만 나는 아무런 표정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서 있었다. 14류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일 잘 견디고 나니까 참 좋더라구요. 사람이 좀 딴딴해졌다고나 할까요? 지금도 모든 것을 다 긍정적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두운 곳에서도 밝은 곳을 기대하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어요.”

“기대만으로 어둠을 견딜 수 있어?”

나는 14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직관적으로야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역시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어두운 곳 한가운데에 밝은 곳이 있지는 않겠죠. 하지만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당장 밝은 면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밝아진다는 것을 말이에요. 마치 지하철 창문처럼요.”

“뭐?”

나는 살짝 놀라서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내가 항상 궁금해왔던 지하철 창문의 존재가 이런 식으로 대화의 주제로 떠오를 줄은 몰랐다.

“그때... 정말 힘들었을 때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생각했었거든요. 도대체 볼 것도 없는 이 지하철 창문은 왜 존재하는 건지 말이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하철 창문이 없다면 우리는 터널이 끝났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걸 말이에요. 물론 지하철 방송도 나오고, 스크린에 안내 문구도 나오지만 그래도 창문을 통해 보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잖아요. 방송도 실수할 수 있고 안내문구도 잘못 나올 수 있지만, 창문 밖으로 보이는 플랫폼만은 부정할 수 없는 증거잖아요. 어두운 터널이 끝났다는.”

나는 가만히 14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알겠더라구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저 창문 밖으로 내가 내릴 수 있는 밝은 플랫폼이 보일 거라는 사실을요. 나는 그저 기다리면 되죠. 초조하고 답답할지 몰라도, 그저 기다리면서 창문을 응시하고 있으면 돼요.”

우리는 흔히 말한다. 인생이 항상 힘들지만은 않다고. 어둠의 끝에는 빛이 있고, 고생 끝에는 낙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긴 어둠 끝에 약간의 빛이 든다 싶으면 어느새 인가 다시 어둠이 찾아온다. 하루 종일 무시당하고 좌절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내게 남은 낙이라곤 잠들기 전의 시원한 맥주 한잔 외에는 없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똑같은 하루가 눈앞에 서 있다.

“인생은 순환선이 아니잖아요. 언젠가는 나도 내릴 수 있는 종착역에 도착할 테고, 그때 저는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으니까요.”

나는 가만히 14류를 바라봤다. 14류는 남은 음료수를 모두 마시고 캔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제가 비록 나이도 어리고, 인생 경험도 적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보니 알겠더라구요. 잡아야 할 것 놓지 않고 놓아야 할 것을 잡지 않는다면, 그래도 인생이 막다른 길로 치닫지는 않는다는 걸 말이에요.”

 

신림동에 있을 때 항상 보이던 사람들이 있었다. 소위 장수생이라고 불리는 나이 많은 고시생들이었다. 그들도 한때는 가능성과 젊음이 넘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할 일이 없어 고시를 계속 준비할 뿐이다. 공부량도 적고 그렇다고 딱히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시험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론을 논쟁하길 즐겼고, 이미 확고하게 굳어져 있는 판례를 비판하는 것을 즐긴다. 말 그대로 시간을 죽이는 것이 전부이다. 문제는 단 하나였다. 놓아야 할 것을 잡고 있었을 뿐이다. 현재가 어떻든 그것이 10년 전에는 꼭 잡아야 할 가치가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래... 멋진 말이네. 잡아야 할 것을 놓지 않고 놓아야 할 것을 잡지 않는다면, 그래도 인생이 막다른 길로 치닫지는 않는다.”

나는 14류를 바라보며 14류가 한 말을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사무실에 올라와 하루의 일과를 훑어본다. 수없이 반복되는 아침. 지루하지만 나름의 아늑함도 느낄 수 있다.
오전 중에 채권자, 채무자들과 전화 통화를 하며 업무의 진행경과를 확인하다. 오후 일찍에는 채무자와 미팅이 있다. 아마 잘 풀릴 것 같다. 간헐적으로 울리는 전화 벨소리를 뒤로하며 사무실을 나간다.

 

사무실 나오자마자 흡연구역으로 이동한다. 6류가 핸드폰 속에 무언가를 골똘히 보고 있다.

“안녕하세요?”

나는 6류에게 인사하며 다가간다.

“응.”

6류를 나를 보며 짧게 답하고 다시 핸드폰 속에 집중한다.

“뭐 보세요?”

“응?”

6류가 나를 다시 보더니 잠깐 무슨 생각을 한다.

“안 그래도 저번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 건물 어떠냐?”

6류와 긴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봤던 기억은 없다. 의아해하며 6류가 건넨 핸드폰 속을 들여다본다. 아마도 30년은 훌쩍 넘은 듯 보이는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2층 창문에 ‘추심’이라는 단어가 붉은색 글씨로 찍혀 있다.

“이 건물 어때?”

6류가 다시 묻는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네요.”

“오래된 건물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6류는 가까이하기 힘든 인물이다. 속 깊은 얘기를 나눈다는 건 시도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6류가 친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6류 역시 나에게 상당한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는 확신이 들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모두 가까이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에게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그냥 6류의 퉁명스러운 답변이 괜히 친근하다.

“건물은 왜요? 회사 옮기시게요?”

나는 ‘추심’이라는 두 글자를 유독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잠깐... 맞는 건가? 아무튼... 사무실 하나 차릴까 한다.”

“네?”

나는 너무 놀라 조금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6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아는 형님이 이 건물에서 추심업을 하고 계신데, 최근에 건강 문제도 있고 해서 사무실을 닫을 생각인 것 같아. 지난주 금요일인가? 그 형님이 전화해서 혹시 사무실 인수할 생각 없냐고 하더라.”

6류는 다소 소곤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말을 이어갔다.

“시장 귀퉁이에 위치해 있고... 거의 형님 혼자서 운영하다시피 한 사무실이라, 사실 수지타산이 맞지는 않아. 그래도 시장 상인들이나 아는 지인들한테 조금씩 사건이 들어오기도 하고, 근처 저축은행하고 유대도 있고 해서 어느 정도 먹고살 수는 있는 것 같아. 그 형님도 초기에는 영업 좀 대신 뛰어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6류의 말에 집중했다.

“워낙 친한 형님인지라... 권리금은 현재 진행 중인 건들 추심 완료되면 그 수수료로 대신하기로 했고, 사무실 인수인계하는 시점 이후부터 들어오는 사건은 전부 내 수입이 될 거야.”

6류가 갑자기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담배 한 대 더 피자.”

6류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계속한다.

“이것저것 고민해 봤는데 사람이 필요해. 2명 정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태로 가만히 담배를 빨아들였다.

“내가 이 바닥에 제법 오래 있긴 했지만, 딱히 아는 사람이 없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사람이 너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너는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나는 뭔가 너하고 유대감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싶네.”

당혹스러운 6류의 말이었지만 놀랄 겨를이 없다. 머리가 열심히 돌아간다. 나의 모든 계산능력이 풀가동 되고 있다.

“너 먹여 살린다고 장담 못해. 그래서 너를 직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거다. 수입은, 누가 수임을 했던지, 누가 추심을 했던지 상관없이 비용 차감 후에 1/3이다.”

‘1/3? 누구 더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내 마음을 읽었는지 6류가 재빠르게 뒷말을 이어간다.

“물론, 3명으로 시작한다는 가정 하에 하는 말이야. 만약 사람 못 구한다면 1/2이지.”

머리가 복잡하다. 이 일에는 3가지 변수가 있다. 첫째, 내가 과연 하나의 사무실을 공동운영할 수준의 추심능력이 있는지 여부. 둘째, 사무실과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영업능력이 있는지 여부. 셋째, 앞의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킨다고 해도 과연 지금의 직장을 그만두는 것보다 심리적, 물질적으로 약간의 이득이라도 있을지 여부.

“사실 너 하고 술 마시고 난 다음에 잠깐 시간 내서 여기저기 다녀봤어. 연락이 닿고 기억에 남는 의뢰인들을 찾아갔지. 그 시장 아주머니를 포함해서.”

“아! 잘 지내세요?”

6류는 내 질문을 못 들었는지 계속 자기 할 말을 이어간다.

“돈 못 받는 것도 습관인 것 같아. 다시 찾아뵈니 누구한테 돈을 빌려줬는데 못 받았다, 물건을 납품했는데 대금을 주지 않는다...”

갑자기 담배 맛이 쓰게 느껴진다. 돈 없어서 돈 못 받는 사람. 너무 착해서 돈 못 받는 사람. 이 세상에는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못 받는 사람들도 많다.

“지금 바로 답 달라는 거 아니니까 잘 생각해 보고 알려줘. 그렇다고 너무 세월아 네월아 하지는 말고. 네가 싫다고 하면 나도 빨리 다른 사람 알아봐야 하니까.”

“네...”

“우리도 좀 가치 있는 일을 해 보자구.”

6류는 짧은 말을 던지고 돌아섰다.

 



어떻게든 하루가 마무리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는 복잡하고 몸은 지쳤다. 모든 것이 귀찮아 불도 켜지 않고 옷도 벗지 않은 채로 소파 위에 누웠다. 잠이 올까 말까 하는 순간 전화가 온다. 대기업 회사원이다.

“나랑 연애하냐?”

전화를 받으며 답한다.

“형님이 요즘 좀 힘들지 안냐? 그걸 가장 잘 아는 놈이 겨우 그렇게 밖에 말 못 하냐?”

“자랑이다, 이 놈아. 그래. 말해 봐라. 위대하신 너의 친구님께서 뭐든지 들어주마.”

대기업 회사원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 나는 우리 둘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야... 화장실에 휴지가 없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큰 목소리도 답한다.

“손가락으로 닦고 나가 이 미친놈아!”

“더러운 새끼.”

대기업 회사원이 전화를 툭 끊는다.

괜히 기분이 좋다. 기분 좋은 졸음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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