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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돌아와서 전역장교 사건을 간단히 보고했다. 쉼표 없는 인간은 고개만 끄덕이다가 말했다.
"고객사한테 제출할 보고서 작성해. 그리고 신규 사건 하나 더 있으니까 살펴보고. 이번에는 확실히 해! 너가 잘할 수 있는 일로 골라서 배당했으니까!"
자리로 돌아와 보고서를 작성해서 쉼표 없는 인간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담배생각이 났지만 신규업무부터 보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사건은 간단했다. 채권자는 작은 운송업체였고, 채무자는 대기업이었다. 채권자는 채무자와 중국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전시할 물품의 운송계약을 체결했고, 계약금은 후불로 2억 2천만원이었다. 이후 운송이 완료되고 작은 운송업체는 대기업에게 운임을 청구했지만, 대기업은 운임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6천만 원 만을 지급했다. 첨부된 서류는 대기업 직원과 작은 운송업체 사이에서 오고 간 이메일 몇 개와 계약서가 전부였고, 음성파일이 하나 있었다.
'이상하네... 계약금은 2억 2천만원 인데, 왜 추심요청 금액은 1억 4천이지? 6천만 원 빼도 2천만 원이 비는데...'
의문을 품은 채 음성파일을 재생했다. 대기업 직원과 작은 운송업체 사장의 통화내용이었다.
'안녕하세요? 저...'
'아니, 왜 자꾸 전화해요? 우리는 6천 이상은 못 준다니까? 무슨 5백만원짜리 물건 운송하면서 2억을 넘게 청구해요?'
'저기, 과장님. 처음에 견적서 제출했을 때 좋다고 했잖습니까? 그리고 운송비랑 상품 가격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또, 일 맡기실 때 정말 중요한 물건이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대기업 과장은 거만한 목소리로 반말을 섞어가면서 말했고, 나이가 많은 작은 운송업체 사장은 겸손하게 존댓말을 사용하면서 말했다.
'그건 됐고. 우리는 6천 이상 못줘요.'
'과장님. 우리도 하청업체 썼어요. 하청업체한테 줄 돈하고, 우리 직원들 월급 빼면 얼마 남지도 않습니다. 제가 마진 안남길테니까, 2억만 주세요.'
사정하는 듯한 작은 운송업체 사장의 목소리는 정말 다급해 보였다.
'저기, 사장님. 저 대리에요. 과장 아니라니까, 왜 자꾸 과장이라고 불러요? 명함은 그냥 준 줄 아나. 아무튼, 더 이상 할 말 없으니까 그만 끊어요. 끊어!'
이렇게 음성파일은 끝났고, 나는 쉼표 없는 인간이 나에게 이 사건을 배당한 이유와 작은 운송업체 사장이 왜 1억 4천만 원만 청구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작은 운송업체 사장에게 전화한다. 작은 운송업체 사장은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고, 나는 청구금액을 1억 6천만 원으로 증액하자고 권유했다.
"사장님. 원래, 우리가 사건을 받으면 채무자들한테 사건 수임을 먼저 통보하게 되어 있거든요. 통상 추심하는 직원들한테 사건 배당받기 전에 일괄적으로 수임통보하는데, 이 건은 급하게 배당이 돼서 그런지 아직 통보가 안되어 있네요. 제가 1억 6천으로 통보할께요. 이거 충분히 받을 수 있고, 받으셔야만 하는 돈입니다. 성공수수료 나가면 직원들 월급도 주기 어려워요. 최대한 많이 받으셔야 해요."
작은 운송업체 사장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꼭 받아 주세요."
쉼표 없는 인간의 배려로 처음으로 기운차게 일할 수 있는 사건을 맡게 되었다. 좋은 기분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좋은 기분은 퇴근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그 이상 오래가지는 못했다.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택배차량을 보게 되었고, 오늘 있었던 이름 모를 직원의 저항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저도 대학 나왔거든요!'
그 역시 꿈꾸던 모습이 있었을 테고, 꿈을 이루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은 했을 텐데 현실은 왜 이러한가. 꿈을 이루지 못했다면 천대받아도 되는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면 나의 가치는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택배기사를 하는 사람은 못 배우고 교양 없는 사람이 되었는가. 누가 감히 사람의 직업을 두고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한단 말인가.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던지 간에 우리 모두는 행복할 권리가 있고 우리 모두는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람 아니었던가?
"길 막지 말고 비켜라."
문 앞에서 멈춘 채 생각에 빠져있던 나에게 6류가 말한다.
"아… 죄송합니다. 퇴근하세요?"
"그래. 집에는 가야지."
"그러게요. 가족들이 기다릴 텐데 얼른 들어가셔야죠."
"나 아직 미혼이다."
"아... 네. 죄송합니다."
깔끔하지 못한 대화를 뒤로 하고 6류와 나는 나란히 지하철을 향해 걸어간다. 어색한 침묵이 함께다. 지하철 역 근처에는 흡연자들을 위한 장소가 있다. 나와 6류는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흡연장소로 나란히 걸어갔다. 6류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물었다.
"너는 결혼했냐?"
"아뇨."
"결혼할 사람은 있어?"
"아뇨."
"너 그러다가 나처럼 된다."
"결혼 생각이 없어서요."
"왜?"
"그냥... 저 혼자 살기에도 버거워요."
나는 '제 유전자에는 실패하는 방법이 너무 깊게 각인되어 있거든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부장님은 왜 결혼 안 하셨나요?"
6류가 갑자기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뭘 이상한 걸 물어봐? 그런 건 물어보는 거 아니다."
뭐야... 자기는 나한테 다 물어보고서... 하지만, 말은 감정과 상관없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를 무겁게 감싸기 시작했고, 이윽고 침묵의 무게가 견디기 힘든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어떻게든 침묵의 무게를 밀어내고 싶다.
“나중에 맥주 한 잔 하시죠. 지난번에 들었던 시장 아주머니 이야기도 좀 자세히 듣고 싶고...”
“그래”
6류는 무미건조하게 답변하면서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 역시 6류를 따라 담배를 피기 시작한다. 두번째 담배를 다 피워갈 즈음 6류가 담배를 끄면서 말한다.
“내가 살아 보니까, 맥주 한 잔 하자는 말 지키는 사람은 없더라”
‘왜 이래? 왜 결혼 안 했냐고 물어본 게 기분에 거슬렀나?’
6류는 뒤에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지하철 역으로 걸어갔다.
‘뭐가 이렇게 냉소적이야.’
속에서 밀려오는 거북함을 삼키며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마지막 담배 한 모금... 필터를 태우면서 플라스틱 녹는 듯한 맛이 밀려 들어왔다. 나는 인류를 구하는 대가로 나의 수명을 갉아먹었다. 영웅이 된 것이다. 필터를 녹인 독가스는 나를 영웅으로 만들었고, 영웅이 된 나는 평상시와 달리 용감해진다.
“부장님! 그럼 오늘 한 잔 하시죠!”
생각 이상으로 우렁찬 나의 목소리에 6류는 인상을 쓰면서 돌아봤고 흡연장소 주변에서 자신의 수명을 대가로 인류를 구원하고 있던 이들은 깜짝 놀라 나와 6류를 번갈아 봤다.
“아씨! 쪽팔리게.”
6류는 인상을 쓰면서 나를 쳐다보더니 등을 돌려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6류의 강한 인상은 독가스로 인하여 솟구쳤던 나의 용기를 한 순간에 제압해 버렸다.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걸 느꼈고 자리도 피할 겸 지하철 역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지하철 계단 중간에는 6류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네?”
“오늘 한 잔 하자면서!”
“아... 네!”
6류는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 반대편 출구로 빠져나갔고, 나는 허겁지겁 6류를 따라간다.
6류와 도착한 곳은 얼마 전 8류와 함께 갔던 호프집이었다. 맥주와 안주를 주문하고 한참이 지나서도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빠져서 대화의 주제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강한 방어막을 쳐 놓은 듯한 6류의 보이지 않는 기세에 사고의 범위는 제한되고 있었다.
지난번에 봤던 40대 초반의 여자가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가지고 오며 웃음기 있는 얼굴로 말한다.
“또 오셨네요? 지금 안주가 조금 밀려서 먼저 맥주랑 간단한 안주 먼저 드릴게요.”
6류는 알겠다고 답변하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여기 자주 오냐?”
6류가 물어본다.
“아뇨. 며칠 전에 처음 왔었는데, 아마 자주 온다고 착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
짧은 몇 마디를 끝으로 대화가 단절된다. 괜히 불편한 마음에 내가 말을 꺼낸다.
“그... 시장 아주머니는 그 후에 어떻게 되셨어요?”
“시장 아주머니? 아... 나도 모르지. 우리야 돈 받아주면 끝이지, 그 이후에 뭘 더 물어보거나 간섭할 그런 직업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죠...”
대화가 또 끊길 것 같다. 어떻게든 이어가 보자.
“그래도 기분은 좋으셨겠어요. 그런 일 잘 끝내고 나면요.”
“글쎄다... 딱히 기분 좋으려고 했던 일은 아니라 잘 기억 안 나네. 뭐랄까,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 때문에 했던 일이라.”
“의무감이요?”
“그래. 의무감.”
“무슨 의무감이요?”
“직업적 의무감.”
“직업적 의무감이요?”
6류가 나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한다.
“말 처음 배우는 애도 아닌데, 뭘 그리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냐?”
나는 무안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한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라서요.”
“그래?”
나는 머뭇거리다 말을 한다.
“사실... 우리 직업이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직업은 아니잖아요. 저희 부모님께서 친구분들에게 ‘우리 아들은 돈 받으러 다니는 사람이에요’라고 자랑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모르긴 몰라도 가족이 있는 다른 분들도...”
나는 순간 말을 멈췄다. 가족은 항상 민감한 단어니까.
“와이프가 ‘우리 남편 돈 받으러 다니는 사람이에요’라고 하지는 않을 거고, 자식들이 친구들한텐 ‘우리 아빠는 돈 받으러 다니는 사람이야’라고 자랑하지는 않을 거다, 뭐 이런 말이냐?”
6류는 내 마음속에 있던 말을 그대로 말했다.
“그렇죠.”
나는 한숨 섞인 짧은 대답을 하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 같이 어디 가서 떳떳하게 내세울 수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직업적인 의무감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거네? 맞냐?”
6류가 나의 눈을 짧게 응시하고 계속 말한다. 다행히 눈빛이 공격적이지는 않다.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너의 기준에서 의사나 변호사는 떳떳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냐?”
물론, 그런 직업도 사람들에게 욕먹는 경우가 많지만 모두가 필요로 하는 직업이고 떳떳한 직업일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질문 하나 더. 무엇이 그들을 떳떳하게 만들지?”
짧게 생각하고 답한다.
“아마도 모든 이에게 필요한 직업이라서 그렇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한테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기 어려운 전문지식이 있잖아요.”
“음... 그럼 질문 두 가지 추가. 의사야 뭐 누구에게나 다 필요한 직업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변호사를 필요로 하는 소송이 더 많을까 아니면 전문가의 채권 추심이 필요한 일이 더 많을까?”
생각지 못했던 6류의 질문에 답을 못한다.
“나도 뭐가 더 많은지는 모르겠는데, 바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직업이 아니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닌 것 같은데.”
6류의 말이 참 옳다고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의 인식이야 어떻든 필요 없는 직업은 아닐 것이다.
“두 번째 질문. 만약에 채권추심이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라면, 왜 추심전문회사가 따로 있을까? 왜 수많은 사람들이 직접 돈을 받지 않고 우리들을 찾아올까?”
더러워서. 내 머리에 처음으로 떠 오른 생각이 바로 ‘더러워서’이다. 마치 조선시대 백정과 같이 채권추심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너무 더러운 일이라서 그럴 것이다.
“추잡해서 그런 걸까?”
마음이 들켜서일까? 너무 깜짝 놀라 입이 벌어진다.
“너... 만약에 말이야. 수중에 돈도 하나 없고, 쌀도 다 떨어지고, 전기도 끊기고, 가족은 굶고 있고... 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 자식이 배고프고 힘들다고 옆에서 울고 있는 상황인데, 친구한테 5백만 원 빌려준 돈이 있다고 하자. 더럽고 치사해서 안 받겠냐?”
6류는 상황을 나열하듯 말했지만 괜히 생생하게 그려진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다. 경험해 본 적 없는 가상의 현실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다.
“언제부터 빌려준 돈 받는 게 더럽고 추잡한 일이 됐었냐? 언제부터 남들이 떠받들어주는 직업, 돈 많이 벌고 명함으로 다른 사람 기죽일 수 직업만이 떳떳한 직업이었냐?”
나는 아무 말없이 맥주만 마셨다. 괜히 부끄럽다. 방금 전까지 택배기사를 함부로 대했던 경비원의 태도에 분개했던 나였다. 하지만 6류와의 대화를 통해 나 역시 경비원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욕하면서도 그것을 알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어리석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덧 맥주잔은 모두 비었다. 가시방석 같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지금, 분위기 파악 못하는 안주가 나온다. 6류는 이제야 나온 안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맥주를 한 잔 더 시킨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맥주 한 잔을 더 시킨다.
새로 나온 맥주를 마시며 조용히 말한다.
“그냥... 저는 누군가의 영웅이 되고 싶었어요. 어릴 적부터...”
6류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 나직하게 말한다.
“될 수 있어. 너보다 훨씬 더 떳떳하고 돈 잘 버는 직업 가진 사람들은 못해도 우리는 될 수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사람들이 못 받는 돈, 우리는 대신 받아줄 수 있어.”
괜히 6류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느껴진다.
밤공기가 시원하게 얼굴을 쓰다듬는다. 하지만 나의 가슴은 화상을 입은 듯 뜨겁게 화끈거린다. 나는 스스로를 더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 좋은 것만 추종하는 그런 사람으로 말이다.
어릴 적 꿈꿔왔던 지금의 나는 이렇지 않았다. 분명히 그랬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전화 소리가 잠을 깨운다.
“야! TV 켜봐.”
대기업 회사원이다.
“뭔데…”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하면서 TV를 켠다.
“너희 집 케이블 TV 나오지? 격투채널 한번 틀어봐라.”
이 정신 나간 녀석이 왜 갑자기 전화를 해서 이러는지 모르겠다.
TV에서는 맨몸의 건장한 남자 둘이서 서로 치고받고 있었다. 이윽고 한 명이 쓰러지고 한 명이 이겼다.
"어?... 어!"
링 위에서 포효하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다... 아니 친구였다. 고등학교 때 딱히 공부를 잘하지도 운동을 잘하지도 못했던 겁 많던 아이.
“야! 너도 기억나지? 내 빵셔틀 하던 녀석이잖아!”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대기업 회사원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전화를 끊었다. 몇 번을 천천히 반복해서 보여주는 주요 장면. 분명히 그 녀석이 맞다. 이윽고 인터뷰가 이어진다.
“우선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먼저 전해 드립니다. 격투기 선수로서는 은퇴할 나이를 훌쩍 넘겼지만 불굴의 정신력으로 한국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었는데요. 막강한 경쟁자를 이긴 지금, 더 이상 겁나는 상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아... 그 겁 많던 녀석이 챔피언이라니...”
아나운서의 질문에 챔피언이 웃으면서 답했다.
“제 인생의 최고의 날을 맞이한 기분입니다.”
챔피언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전 겁나는 상대가 없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겁이 많습니다. 확실히 말하지만, 지금 저를 보고 있는 사람 중 가장 겁이 많은 사람만큼 저도 겁이 많습니다. 심지어 밤거리에 고등학생 무리들만 봐도 겁이 나죠. 하지만 겁이 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 두려움이 극복할 대상인지, 아니면 그냥 흘려버려도 되는 대상인지입니다. 극복해야 할 대상이면 무슨 수를 써서도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용기라고 부르죠. 저는 한국에서 가장 강한 사람도 아니고 겁이 없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맞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다시 전화가 울린다. 대기업 회사원이다.
“야! 넌 무슨 매너 없이 그렇게 매정하게 전화를 끊냐?”
“어... 미안. 조금 놀라서.”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예전의 그 유약하던 녀석이 짐승이 되어 있다니!”
대기업 회사원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웃으면서 말했다.
“쟤 많이 맞지도 않은 것 같은데 다음 주에 같이 술 한잔 해도 괜찮겠지? 너도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비워둬라. 챔피언과 술 한잔할 영광을 주겠노라.”
“너 쟤랑 아직도 연락하냐?”
“아니.”
“미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도 명색이 챔피언인데 인터넷 검색하면 전화번호가 나오냐?”
“자식. 이래서 너는 나한테 안 되는 거야. 아까 인터뷰할 때 뒤에 광고판 봤지? 우리 회사가 스폰하는 체육관인 것 같단 말이지. 회사에서 전화 몇 통 돌리면 전화번호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라구.”
“아, 몰라. 난 언제나 주말에 약속 없으니까, 알아서 연락해라. 난 좀 더 자야겠다.”
모르겠다. 연락이 오면 나가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다시 잠이나 자야겠다.
시체처럼 누워 이틀을 보냈다. 그리고 또다시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 항상 피곤하고 귀찮은 반복적인 한 주의 시작이지만 그래도 무언가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다. 다른 복잡한 생각들은 차지하고, 최소한 내 손으로 내 밥벌이를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최악은 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상시의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생각이었을 텐데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기분이 가벼웠다. 옛 친구가 챔피언이 되어서일까? 아니면 6류의 따듯한 말 한마디 때문일까? 어차피 회사에 들어서는 순간 기분이 나빠지겠지만 지금 당장의 좋은 기분이 괜히 나를 들뜨게 만든다.
창문이 왜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지하철에서 멍하니 창 밖의 검은색 터널을 보고 있었다. 피곤한 월요일 출근길이라 그런지 지하철 안에서 서로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끄러웠다. 소음을 피하고 싶은 생각에 옆과 뒤에 있는 사람에게 내 무게를 일부 나눠주고 가볍게 눈을 감았다. 이어폰을 꺼내 노래를 듣고 싶었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는 동작을 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급정거에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떠졌다. 순간 내 무게를 나눠졌던 사람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나는 온전해 내가 가진 모든 무게를 버티고 서게 되었다.
‘무겁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감당하고 있던 내 몸의 무게가 새삼스럽게 큰 부담처럼 느껴졌다.
“승객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드립니다….”
방금 전의 급정거에 대한 사과 방송이 나왔다.
‘언제부터 급정거에 대한 사과를 했었지?’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잘 기억이 안 난다. 왜 오늘 아침에는 기분이 좋았었는지, 왜 항상 느끼던 스스로의 무게가 갑자기 그토록 무겁게 느껴졌었는지, 언제부터 지하철에서 사과 방송이라는 것을 했었는지... 쓸데없는 생각들이 시간을 잡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윽고 내려야 할 곳에 도착했다.
‘이제 실전이군’
마음을 다잡으며 사무실로 들어간다.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업무내역을 본다. 전화를 하고 채무자들을 만난다. 8류와 아무런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고, 14류의 허황되고 이상적인 이야기를 들어준다. 쉼표 없는 인간은 언제나 그런 것처럼 무언가를 계속 주문한다. 그리고 퇴근. 집. 잠. 알람 소리.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 금요일이 다가왔다. 의도적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번 주 내내 6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익숙한 이름 석 자는 두 번 봤다.
금요일 저녁. 채무자와의 미팅 후 바로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탄다. 출근길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감 없이 서 있다. 갑자기 느껴지는 손 끝의 진동.
‘내일 6시까지 강남. 항상 만나던 곳.’
대기업 회사원이다.
마음 속으로 건조하게 생각한다.
‘챔피언도 별거 아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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