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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보니 오후 4시다. 참 잘 잤다.
‘천천히 씻고 나가야지.’
약간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며 잠을 깨운다. 그리고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향한다. 평일보다는 한산한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 보며 오랜만에 웃음을 지어본다.
나와 대기업 회사원 그리고 챔피언은 정말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당연한 수순과 같이 우리는 챔피언의 우승을 축하했다. 그리고 학창 시절의 겁 많던 그 아이의 과거를 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챔피언은 여유가 있었다. 챔피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아는 그 수많은 동창들 중에 챔피언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챔피언이었으니까.
어느덧 술이 우리의 용량을 초과하기 시작했다. 나는 졸음을 참기 위해 가게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 모금 피웠다.
‘나 빼고 다 성공했네.’
짧은 한탄을 담배연기에 날려 보내고 가게로 들어왔을 때 나는 챔피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금세 알게 되었다. 약간의 당황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분노가 섞인 표정이 괜히 나를 겁먹게 했다.
“야! 내 말이 맞아, 틀려? 너 인마 고등학교 때 내 빵셔틀 했었잖아! 이제 운동 좀 했다고 누구 무시하냐?”
“야... 너 많이 취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나 안 취했어 인마! 왜? 내 목이라도 졸라서 기절시키게? 이 새끼 많이 컸네?”
높은 목소리로 상대방을 무시하는 대기업 회사원의 말에 가게 안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간혹 누구는 챔피언을 알아본 것도 같지만, 섣불리 사인을 해 달라고 오지는 못했다. 분위기가 험했다.
나는 더 이상 바라만 볼 수 없어서 둘 사이에 끼어 앉으며 말했다.
“우리 자리 옮기자! 한 곳에서 너무 많이 먹었다. 너도 좋지?”
당장 이 자리를 모면하고 싶었던 나의 간절함이 챔피언에게 전달되었는지 챔피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는 자리를 벗어났다.
“소란 피워 죄송합니다.”
챔피언은 가게를 나서면서 계산대에 서 있는 남자에게 얘기했고, 나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미안함을 표시했다. 대기업 회사원은 자리에서 일어난 덕분인지 갑자기 조용해졌다.
우리는 가게를 벗어나 거리를 걸었다. 나는 아무 말없이 담배를 피웠고, 챔피언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모자를 눌러쓰고 아무 말없이 걷고 있었다. 대기업 회사원은 살짝 비틀거렸지만, 그래도 혼자의 힘으로 우리 둘을 반 걸음 뒤에서 잘 쫓아오고 있었다.
챔피언의 얼굴을 곁눈질로 살펴본다. 대기업 회사원 챔피언을 빵셔틀이라고 부른 것에 혹시나 기분 나빠하지 않았을까 표정을 살핀다. 깊게 눌러쓴 모자 덕분에 표정을 읽기 어렵다.
대기업 회사원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창 시절 둘의 관계는 꽤나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유달리 수줍음을 많이 타고 겁이 많았던 챔피언에게는 딱히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이런 챔피언에게 먼저 다가가고, 같이 점심도 먹고, 방과 후에 어울리기도 했던 사람이 대기업 회사원이었다. 나와 변호사, 그리고 학원 강사 역시 대기업 회사원의 부름에 응해 챔피언과 이런저런 추억을 쌓기도 했었다. 아마 챔피언도 대기업 회사원의 그런 호의를 매우 고맙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어이! 챔피언! 내가 잘못했다. 내가 진짜 웃긴 얘기가 있어서 그거 말한다는 게 그만 엇나가 버렸네. 우리 한 잔 더 하자! 이번엔 진짜로 신사답게 젠틀하게 마셔줄게!”
나와 챔피언은 못마땅한 얼굴로 대기업 회사원을 바라보았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대기업 회사원은 우리를 끌고 지하의 조용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나와 챔피언은 못 이기는 척 그의 손길에 끌려 자리를 옮겼다.
지하의 조용한 술집은 특이한 분위기였다. 방으로 구분된 것은 아니지만 테이블이 하나하나 구분되어 있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고, 은근히 크게 틀어 놓은 재즈와 블루스 음악은 품격 있게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 주었다.
“내가 쏜다! 씨발! 내가 너희들한테 존나 미안해서 내가 쏜다!”
나와 챔피언은 답 없이 조용히 대기업 회사원을 바라만 보았고, 대기업 회사원은 터무니없이 비싼 양주와 과일 안주를 주문했다. 그리고... 5분이나 지났을까? 번개처럼 술과 안주가 준비되었고, 우리는 우리만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상하리 만치 비싼 술과 안주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회사원은 양주잔에 술을 따른 후 우리에게 전달했다. 우리는 비싸고 독한 술을 한 모금 정도 마신 후 잔을 내려놓았다. 회사원은 우리를 비웃듯 연거푸 3잔의 잔을 비우더니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는다. 꽤 오랜 시간 아무 미동도 없다. 조용하다. 그리고 정적을 깨고 회사원이 갑자기 말을 시작한다.
“내가 진짜 웃긴 얘기 해 줄게.”
챔피언은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았고, 나는 아직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기업 회사원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야! 너 사람 죽여 봤냐?
대기업 회사원은 챔피언을 노려보며 말했다. 챔피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을 왜 죽이냐?”
그러자 대기업 회사원이 말했다.
“넌 그래서 내 밑이라는 거야.”
“야!”
나는 더 심각한 말이 나오기 전에 대기업 회사원의 말을 잘랐고, 대기업 회사원은 손을 가로저으며 나의 의도를 파악했음을 알렸다.
“너희들... 내가 지난주에 100명을 죽였거든... 그래서 회사에서 칭찬받았다.”
나와 챔피언의 얼굴은 급격히 굳었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른 채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조금 잔잔해진 대기업 회사원의 목소리가 우리를 깨운다.
“회사에서 매출이니, 영업이익이니 하는 숫자들이 매달 바닥을 치니까... 사람을 자르라고 지시를 내린 거야.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100명을. 그리고 재수 없게 내가 그 일을 담당하게 됐어. 처음에는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지... 내가 무슨 거창하게 노동인권을 위해 노력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태일 평전 읽고 속으로 울었던 놈인데...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많이 했다.”
나와 챔피언은 여전히 얼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팀장이 와서 말하는 거야. ‘넌 이 일 잘하면 올해 고과는 보장된 거고, 이 일 못하면 100명 안에 네 이름이 들어갈 거다’라고 말이야.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냐? 애들이 피자 먹고 싶다고 조르고 치킨 먹고 싶다고 조를 때 돈 없다고 못 사주는 내 모습이 생각나더라... 100명의 가족이 굶어 죽던, 거리에 나 앉던 뭔 상관이냐? 내 새끼들이 당장 피자랑 치킨 못 먹게 생겼는데.”
대기업 회사원은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그의 속은 절대로 담담하지 않다는 것을 나와 챔피언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강한 척, 아무리 잘난 척해봤자 우리는 기껏해야 장기판 위에 졸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가 된다.
“진짜 웃긴 얘기는 시작도 안 했어, 자식들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기업 회사원은 계속해서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내 새끼들 피자랑 치킨 사 주려고 100명의 가족을 거리로 내쫓는 작업을 할 때 말이야. 20인치 살짝 넘는 조그마한 모니터를 보면서 생각한 게 뭔지 아냐? 어떻게 하면 보고서를 한 번에 통과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문장을 좀 더 간결하고 세련되게 쓸 수 있을까... 그게 내 생각이었고, 가장 큰 고민이었다.”
누군가는 대기업 회사원의 말이 인간성을 상실한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의 심성이 삐뚤어져 그런 것도, 그가 잔인해서 그런 것도, 일에 너무 몰입해서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대기업 회사원은 그냥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결과가 이후에 어떠한 감정으로 자신을 몰아갈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보고서는 단 한번에 통과됐어. 평사시에는 인사도 안 받아주던 어르신들이 웃으면서 칭찬하기까지 했어.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나를 발탁 승진시킬 거라고 하더라. 비록 1년이지만 동기들보다는 확실히 빠르지.”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어제 100명 중 한 명이 4살, 2살 애들 남기고 자살했다...”
순간 나와 챔피언의 시간은 정지됐다. 본 기억도 없는 노동자의 자살 신문기사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씨발... 존나 미안한데... 나 같은 개새끼 때문에 한 가족의 행복이 작살 났는데... 난 그 시간에 애새끼들이 원하는 피자나 사 주고 있었다.”
챔피언은 아무 말없이 대기업 회사원에게 술을 권했고, 대기업 회사원은 아무 말없이 술을 마셨다. 이윽고 대기업 회사원은 다시 챔피언을 무시하기 시작했고, 챔피언은 아무 말없이 대기업 회사원의 술주정에 맞장구쳐 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챔피언은 처음으로 대기업 회사원의 빵셔틀이 되어 몇 번이고 심부름을 해주었다.
새벽 2시가 훌쩍 넘은 시간 나와 챔피언은 대기업 회사원을 택시에 태워 집으로 바래다줬다. 아파트 입구에는 낯익은 얼굴이 서성이고 있었다. 대기업 회사원의 어머니였다. 나와 챔피언은 얼른 달려가 인사를 올렸다. 대기업 회사원의 어머니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냈어? 여기 이 분도... 친구? 어렸을 때 본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하네!”
“네. 안녕하세요.”
“에구... 이놈의 자식이 술이 많이 취했네. 애들도 기다리는데 말야. 이번에 큰 일 해서 올해 무조건 승진한다고 그렇게 자랑하더니 술 먹고 싶어서 그랬나?”
대기업 회사원의 어머니는 남들보다 빠른 승진을 앞둔 자식을 자랑스러워했고, 나와 챔피언은 과장된 웃음으로 연신 고개만 숙이면서 맞장구쳐 줬다.
“야... 우리는 왜 사냐?”
대기업 회사원 어머니가 아들을 부축하고 들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챔피언이 물었다.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다.”
“넌 꿈이 뭐냐?”
챔피언은 짧은 침묵 뒤에 말했다.
“모르겠다.”
챔피언과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헤어졌다. 지하철이 끊긴 늦은 밤거리를 걸어가며 한 주 동안 가벼웠던 기분이 일순간에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젠장, 머리 아파 죽겠네.’
술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다시 똑같은 한 주가 시작됐다.
문득 평일은 밤이고, 주말은 낮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말 내내 시체처럼 누워 있다가 월요일이 되면 영혼 없이 걸어 나오는 게 꼭 오래된 좀비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야! 너 지난번에 운송회사 돈 받아 주기로 한 건 어떻게 됐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쉼표 없는 인간의 질문이 나를 맞이한다.
“그거 이번 주 화요일에 채무회사 담당자 만나기로 했습니다.”
“빨리 처리해! 너도 밥벌이하란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이전 같았으면 쉼표 없는 인간의 닦달이 마냥 싫었겠지만 더 이상 부정적인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변함없이 나를 대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쉼표 없는 인간의 메아리를 등지고 앉아 모니터를 보았다. 하얀색 빈 웹페이지를 생각업이 응시하다 갑자기 6류가 생각난다. 6류와 뜻하지 않은 대화를 나눈 이후 한 번도 6류를 마주치지 못했다. 괜히 궁금하다. 전화를 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그래도 제법 깊은 얘기를 나눴는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까이 다가가기 쉽지 않다.
‘전화를 해 볼까? 딱히 안부 묻는 그런 사이는 아닌데...’
6류가 껄끄러운 것도 아닌데 괜히 망설여진다. 아마도 평상시의 나와는 다른 행동을 생각하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가만히 앉아 전화기만 만지작 거리는 내 모습이 마치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여자에게 연락을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대학생처럼 보일 것 같다.
‘모르겠다.’
굳이 필요 없어 보이는 용기를 내면서 6류에게 전화를 건다.
“왜?”
꽤나 긴 신호 후에 6류가 답한다.
“아... 예... 저 그게 지난주 이후로 계속 안보이셔서...”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내가 전화할게. 지금 좀 바쁘다.”
“아... 네.”
내 답이 끝나기도 전에 6류는 전화를 끊는다.
‘무안하구먼...’
괜히 머쓱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담배를 찾는 중에 갑자기 전화가 온다. 대기업 회사원이다.
“응. 어인 일이냐?”
“친구들끼리 무슨 일 있어야 전화하냐? 그날은 잘 들어갔냐? 챔피언이야 뭐 걱정할 것도 없지만, 너 같이 나약한 녀석한테 밤은 위험하잖아?”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은 묻어 버린 듯 대기업 회사원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유쾌한 리듬과 함께이다.
“네놈 꼬장 들어주느라 진 빠져서 죽는 줄 알았다. 일요일 내내 시체놀이 했지.”
“쳇. 비싼 술 사줘도 지랄이구만. 뭐... 어쨌든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냐?”
갑작스러운 약속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괜히 한 발 물러선다.
“딱히 약속이 있는 건 아닌데, 왜? 무슨 일 있어.”
“그냥 좀 할 얘기도 있고. 흠.... 뭐랄까? 상담이 필요하다고 할까?”
하긴... 가족한테는 말하지 못할 고민을 안고 있는 가슴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옛 친구의 마음을 풀어줘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
“오케이. 형님께서 너의 여리디 여린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도록 하지.”
“뭔 헛소리도 그렇게 징그럽게 하냐? 8시는 너무 늦지? 7시에 항상 만나던 곳에서 보자고.”
대기업 회사원이 누군가에게 뭐라고 말하면서 전화를 끊는 소리를 끝까지 들으면서 다시 담배를 찾는다.
어느덧 대기업 회사원과의 약속시간이 다 되었다. 오늘은 딱히 한 일도 없지만, 괜한 피곤함을 느끼면서 친구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을 나와 지하철을 탔다.
‘아... 왠지 별일 아닐 것 같은데 괜히 만난다고 했나? 이상하게 피곤하네.’
일요일 내내 잠을 잤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꽉 차 있는 피로감을 느끼며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해 본다. 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눈을 감는다. 지하철 특유의 불규칙한 듯 규칙적인 듯한 리듬에 몸을 맡기면서 빈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나에게 있어 빈 이어폰은 일종의 익명을 보호해 주는 무기와 같다. 이어폰으로 무장을 하면 낯선 사람이 갑자기 길을 물어보는 일도 없다. 그리고 왠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익명성 속에서 지하철을 내리고 많은 사람들 사이를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어느덧 약속 장소에 도착해 대기업 회사원을 찾는다.
“어이!”
“빨리 왔네?”
나와 대기업 회사원은 식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슨 일이야?”
자리에 앉기 무섭게 오늘 약속의 목적을 묻는다.
“성격 하곤... 뭐 이리 급하냐? 우선 밥 먹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 옮겨서 이야기하자.”
유난히 시끄러운 식당에서 우리는 아무런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회사에서 떠도는 루머, 연예인 이야기, 아침에 신문에서 봤던 젊은 정치인의 소신 발언 등... 누구에게는 시간을 버리는 무의미한 일들이겠지만, 나는 나름의 편한 분위기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다 먹었으면 자리 옮기자.”
대기업 회사원이 물을 마시며 일어선다.
‘도대체 무슨 말인데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나도 따라 일어서면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대기업 회사원이 고른 장소는 몇 번인가 같이 가봤던 술집이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맛있는 안주와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장소였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술잔을 비우면서 저녁을 먹으며 나눴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속으로 무슨 일 때문에 나를 불렀을까 하는 궁금증이 계속 밀려왔지만 본인이 직접 말하기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계속 참는다.
“궁금하지?”
갑자기 대화의 허리를 자르면서 밑도 끝도 없이 묻는다.
“응.”
나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대답한다.
대기업 회사원은 잠깐 동안 말없이 잔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다.
“나 잘생겼냐?”
“미친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못생긴 게 너다.”
대기업 회사원은 빙그레 웃으면서 답한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봐도 나는 그다지 잘난 얼굴은 아니거든.”
“왜 성형수술이라도 하게? 견적은 나오냐?”
나의 짓궂은 농담을 못 들었는지 대기업 회사원은 다른 사람의 고민을 전달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말이지. 우리 마눌님이 참 예쁘잖아. 그런데 왜 나 같은 인간이랑 결혼을 했을까? 딱히 잘 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래가 창창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런 질문에 대해서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사실 대기업 회사원은 준수한 외모를 가졌다. 성격도 시원하니 학창 시절 남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직장? 전문직이 아닌 이상 대기업 회사원보다 나은 직업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래저래 생각해 봐도 최소한 상위 3% 안에는 들어가는 녀석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사람도 참 대단해. 나 같은 놈하고 같이 사는 것 보면 말이야.”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눈을 감은 채 미끌미끌한 무언가를 만지는 기분이다. 분명히 불쾌하지만 불쾌한 기분의 원천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친구야. 내가 모든 걸 내려놓는다면 너무 이기적이겠지?”
“야! 이 미친 새끼야!”
술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조용히 해라. 쪽팔린다.”
대기업 회사원은 싱긋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나 역시 훈련된 반사신경에 따라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불쾌감은 작게 만들 수는 없었다.
“누가 죽는다고 했냐? 그냥 다 그만두고 어디 조용한 곳에 숨고 싶다.”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대기업 회사원을 노려보았다. 대기업 회사원은 나의 태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을 계속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참 나약해. 좋게 표현하면 착하다고 해야 하나? 그날 너희들에게 그렇게 얘기하고 나서 다음날 맑은 정신으로 집사람한테도 똑같은 말을 했어. 뭔가 위로받고 싶다는 그런 건 아니고, 왠지 말을 안 하면 죄짓는 듯한 기분이라서 그랬는데... ”
대기업 회사원은 짧은 한숨을 뱉으며 말을 이어간다.
“차라리 와이프가 ‘그럼 어쩌겠냐, 그럼 그 사람 대신에 우리 가족이 길거리에 나 앉아야 하겠냐, 그냥 신경 쓰지 말아라’ 이렇게 말해줬으면 나도 내 행동이 정당했다고 스스로 방어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 와이프는 너무 속이 깊어.”
나는 아무 말없이 대기업 회사원을 바라보았다.
“와이프가 그러더라구. 괜찮다고, 자기는 항상 내 편이라고,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 만으로 충분히 벌 받고 있는 거라고 말하더라. 세상 모든 사람이 비난해도 자기는 내 곁에 있을 테니 같이 잘 버티자고 하더라.”
대화가 어떻게 이어지려고 이러나... 대기업 회사원이 어떤 느낌으로 와이프의 말을 받아들였길래 이리도 끈적하고 불쾌한 기분일까.
“와이프의 말을 듣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 집사람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래서 같이 벌을 받고 견뎌내자고 하는구나...”
대기업 회사원은 빠르게 술을 비웠다. 나는 정신을 놓고 그의 술잔이 비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대기업 회사원은 스스로가 술잔을 채우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래... 내가 이렇게 예쁜 한 여인의 남편이고, 두 아이의 아빠인데 쉽게 놓아 버리면 안 되지.”
본인이 채운 술잔을 다시 비우고, 또다시 채운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여기가 아프냐. 나 어떻게 하냐... 너무 힘들다.”
대기업 회사원은 본인의 가슴을 쥐어짜듯이 움켜쥐며 고개를 숙인다. 나는 그저 아무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뭐라고 말해 줘야 하나... 뭔가 약간이라도 힘이 될 만한 말을 해 줘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담배 한 대 정도를 필 시간 정도가 흘렸다. 대기업 회사원이 허리를 세우면서 말한다.
“그래... 이러지 말아야지. 아무리 힘들어도 그러지 말아야지. 이 세상 모든 사람한테는 빚져도 가족에게만은 빚지지 말아야지...”
뭐라고 말해줘야 하지?
“그 보고서... 종이 위에 쓰여 있던 무미건조한 검은색 글씨들이 사람들의 생계를 잔인하게 쳐내고 있을 때 나는 조금씩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 속으로 기도했지. 나만 벌하소서. 제발 나만 벌하소서. 나만 바라보고 있는 늙은 부모님과 어린 자식들이 슬프지 않게 나만 벌하소서. 나만 바라보고 있는 한 아름다운 여인이 슬프지 않게 나만 벌하소서’”
착한 녀석.
“그런데, 며칠 전부터는 이렇게 기도해. 내가 정말 쓸모가 없어서 그냥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맞다고 해도, 더 이상의 사용처가 없어서 용도폐기 된다고 하여도... 제발 스스로를 버리게 하지는 말아 달라고...”
착한 녀석.
“제발 스스로를 버리게 하지 말아 주소서. 제발 스스로를 버리게 하지 말아 주소서... 나에게 힘을 주소서... 나를 용서해 주소서…”
대기업 회사원은 작은 소리로 계속 기도를 했다. 내가 지금까지 봐 왔던 어떤 기도보다 간절했다.
“만약에…”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만약에 말이야. 당시로 돌아간다면 그때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너를 그래도 20년 넘게 알고 지낸 것 같은데, 너는 절대로 다른 선택 못할 거야. 가족들 굶기기 싫으니까... 그렇다고 한번 경험해 봤으니 지금보다는 덜 힘들까? 그렇지 않겠지... 너는 착한 녀석이니까. 그냥 이겨 내야지... 어쩌겠냐. 이게 우리들의 삶인 걸.”
하루 종일 미칠 것 같았을 것이다. 동료들이 자신을 볼 때마다 비웃고 있다 느꼈을 것이다. 임원들이 자신의 인사를 받아 줄 때마다 본인이 비굴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불렀겠지... 이렇게 마주 앉아서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장담할 수 있어. 네가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너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고, 똑같이 괴로워했을 것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또 하나 장담할 수 있어. 만약 네가 그 일을 안 했다면 다른 누군가가 아무런 죄책감없이 그 일을 했을 것이라고 말이야. 나는 확신해. 지금 네 주변에 있는 너의 선배, 동료, 후배들은 다 너를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할 거야. 절대로 너를 미워하거나 무시할 수 없을 거다.”
위로가 되어 주고 싶었다. 답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잘못 들으면 훈계처럼 들릴 것 같은 말만 계속 이어가고 있다. 젠장... 어떻게 해야 꼬여버린 실타래를 풀 수 있을까.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지혜가 없다면 실타래를 끊어 버릴 수 있는 힘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대기업 회사원은 아무 말없이 술을 계속 마셨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같이 술을 마셔 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만 일어나자. 벌써 9시가 넘었다. 마눌님한테 혼나겠네. 오늘은 내가 계산할 게, 다음에 네가 사라.”
대기업 회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나는 그저 친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헛소리 들어줘서 고맙다. 난 늦어서 택시 타고 갈게.”
‘이대로 그냥 보내도 되는 건가?’
그저 생각만 할 뿐 뭐라고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다.
대기업 회사원은 바로 택시에 타고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는 듯하다. 차가 출발하려 하자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나 역시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하... 뭐가 뭔지 모르겠다.’
갑자기 피로가 밀려오는 게 느껴진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기둥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눈을 감았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 소리, 환승을 알리는 방송 소리, 지하철이 달릴 때 들리는 울림소리... 그냥 모든 소음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손 끝에 진동이 느껴진다.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 이름이 낯설다. 누구지? 채무자? 예전 고객?
“여보세요?”
“네... 저기 안녕하세요. 저...”
목소리를 듣자 순간 생각이 난다.
“아! 제수씨 잘 지내셨어요?
대기업 회사원의 아내이다.
“네. 잘 지내셨죠? 다른 게 아니라...”
뭔가 말하기 어려운 게 있는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저기... 오늘 우리 오빠 만나셨죠?”
“네.”
“저기... 혹시 아직도 같이 계신 건 아니시죠?”
“네?”
약속장소에서 대기업 회사원의 집이 우리 집보다 훨씬 가깝다. 이미 도착했어야 하는 시간이다.
“아직 안 들어왔어요. 퇴근할 때 친구 만난다고 연락했었는데... 9시쯤에는 집에 들어온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늦어지는 것 같아서 전화했는데 전화를 안 받아요.”
“오늘 술을 좀 많이 마셔서 그럴 거예요. 아마 택시 안에서 잠들었을 거예요.”
나도 괜히 불안한 마음을 생긴다.
“그게... 방금 전에 이상한 문자가 와서요. 자기랑 결혼해 줘서 너무 고마웠다고...”
“네?”
나는 순간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제수씨, 일단 계속 전화해 봐요. 저도 계속 연락해 볼게요. 너무 불안해하진 말구요. 연락 닿으면 바로 전화드리겠습니다.”
급하게 전화를 끊고 대기업 회사원에서 전화를 한다. 안 받는다. 나는 속으로 욕을 하면서 지하철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갔다. 어디로 갔을까, 집이 아니면 어디로 갔을까... 제발 모두가 슬퍼할만한 선택은 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정해진 목적지도, 어디로 향할지 방향도 잡지 못했지만 마냥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어리석다. 정말 어리석다. 어떻게 하지? 혼자서 이 넓은 서울 바닥을 다 뒤질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순간 학원 강사가 생각나서 전화를 한다. 안 받는다.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야속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음성만이 공허하게 돌아온다.
변호사... 전화해 볼까? 하지만 마지막 만남에서 훔쳐봤던 문자 내용이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사람 죽게 생겼는데, 내 자존심이나 생각하고 있다니... 어리석은 녀석. 정말 역겹구나.’
스스로에 대하여 욕을 하며 변호사에게 전화를 해 보지만 들리는 건 그저 공허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다.
하... 미치겠다. 정말 미치겠다. 우리 넷이 정말 친했었는데, 그 누구도 친구 하나를 위해 손을 내밀어줄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서글프다.
◤ 수능이 끝나고 대학 합격자도 모두 발표가 난 이후였을 것이다. 나와 변호사, 대기업 회사원, 그리고 학원 강사는 어찌 되었든 모두 대학을 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여유 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무척 추웠던 어느 날 우리 4명은 밤늦도록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야. 날씨 왜 이리 춥냐. 얼어 죽겠다.”
학원 강사의 엄살 섞인 말에 대기업 회사원이 말을 받는다.
“잠들지 마시게나 친구여. 이렇게 추운 날에 잠들면 죽는다네.”
“미친놈.”
나는 말도 안 되는 시시껄렁한 농담에 욕으로 답했다. 느닷없이 변호사가 분위기를 깨는 말을 꺼낸다.
“우리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이렇게 만나겠지? 우리 자식들끼리도 서로 친하게 지내고... 어쩌면 사돈 맺을지도 모르겠다.”
학원 강사가 말한다.
“넌, 나중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난 변호사 될 거잖아? 열심히 돈 모아라. 내가 너의 사위가 되어 주마.”
“그럼 난 아들만 낳아야겠다.”
“이 정신 나간 것들아.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썰렁한 농담 좀 그만해라. 진짜 죽겠다.”
우리는 서로를 구박하며 한껏 움츠린 상태도 목적지 없이 계속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잔뜩 움츠린 어깨 덕분에 목이 빳빳해진다고 느껴지는 순간 변호사가 또 한 번 분위기 깨는 말을 꺼낸다.
“만약에, 우리가 서로 멀어진다면... 그런데 너희들이 너무 보고 싶지만 서로 연락이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순간, 누군가 말했다.
“뭘 어떻게 해. 우리의 추억이 가득한 곳으로 가면 되지. 또 아냐? 누군가 와 있을지. 그리고 아무도 없으면 뭐 어때. 건물 하나, 풀 한 포기, 모래 알갱이 하나조차도 우리 추억을 품고 있을 텐데.” ◢
대기업 회사원이었을까? 학원 강사였나? 학원 강사가 말했다면 과연 대기업 회사원은 그때 그 말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까?
‘아이 씨.. 미치겠네. 학교는 여기서 먼데... 만약 갔다가 없으면 정말 끝장이다.’
머리는 계속 무언가를 계산하는지 뜨겁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몸은 어느새 택시에 구겨지듯 들어가며 급하게 행선지를 말한다. 연신 손가락을 물어뜯고 있는 내가 너무도 초초해 보였는지 택시는 신호를 무시해 가며 말 그대로 총알같이 달렸다.
“감사합니다!”
나는 5만 원짜리 지폐를 던지듯 건넨 후 택시에서 튀어나왔다. 이제는 낯설게 개조되어 버린 익숙한 느낌의 학교 교문이 눈앞에 펼쳐진다. 마치 커피에 우유가 퍼지듯이 옛 추억이 가슴에 퍼진다.
교문은 작은 쪽문만 열려 있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무작정 쪽문으로 들어간다. 학교 경비원이 외친다.
“저기요, 아저씨! 한 밤 중에 학교 못 들어가요!”
“졸업생입니다.”
나는 경비원의 제지를 애써 무시하며 빠른 속도로 들어간다.
“저기요!”
나는 계속 무시한다.
“야! 진짜 오늘 왜 이래? 무슨 야밤에 동창회 하냐? 들어가지 말라니까!”
동창회? 학원 강사는 분명 이곳에 있다. 나는 도망치듯이 인생 최고의 속도로 학교 건물로 뛰어간다.
‘고등학교 때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었는데. ’
학교 안의 작은 동산을 감싸 안고 있는 언덕이 너무 버겁다.
‘젠장... 어디 있는 거야?’
건물 안에는 못 들어갈 것이다. 운동장 가운데는 없겠지... 운동장 구석? 경비원을 피해 어딘가에 숨었을 테니 운동장은 아닐 것이다.
‘어디 있는 거야?’
크게 이름을 불러볼까? 경비원한테 잡히더라도 그게 더 현명한 방법일까?
노천 강당의 계단을 뛰어올라가며 계속 이곳저곳을 살핀다. 두세 번 오갔던 장소를 계속 빙빙 돈다.
‘어?’
순간 창립자 동상 앞에 우뚝 섰다.
‘우리 졸업사진... 그래. 졸업할 때 이 동상 앞에서 다 같이 사진 찍었었지.’
동상 앞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동상 뒤로 돌아간다.
“야... 이 미친놈아...”
대기업 회사원은 동상 뒤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다. 이 세상 누구보다 작아진 모습으로 너무나도 서글프게 울고 있다.
“나... 너무 힘들고 너무 무서워. 그런데 살고 싶어.”
회사원은 흐느끼며 말한다.
“진짜 죽고 싶은데 너무 살고 싶어. 애들 생각, 가족들 생각, 친구들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니까 너무 살고 싶어.”
회사원은 내 어깨에 기대어 울면서 말한다.
“미친 새끼... 죽긴 왜 죽어. 내가 있는데. 가족들이 있는데. 이렇게 멋진 친구들과의 추억이 있는데 죽긴 왜 죽어.”
나는 회사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달랜다. 저 멀찍이 경비원이 우리를 지켜보다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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