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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류로부터 동업 제안을 받은 지 일주일 가량이 지났다. 이제는 슬슬 답을 줘야 할 시기가 다가온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일주일 동안 고민한 적도 없었다. 갑자기 6류의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면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 버렸다. 마치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답이 나올 것 같이 말이다. 하지만 아직 나의 마음은 윤곽도 잡지 못한 상태이다.
지금 내 앞에는 6류가 서 있다.
“생각 좀 해 봤냐? 시간이 좀 더 필요한가?”
시간... 시간이 참 야속하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내 편이었던 적이 없던 괴물 같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정말 모르겠어요. 단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수학문제를 푸는 듯한 기분이에요. 문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숨이 막히는 것 같아요.”
“그래. 좀 더 생각해봐.”
6류는 특별한 감정을 보이지 않으며 짧게 답하고 돌아선다.
‘아... 썩을...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아무나하고라도 얘기 좀 해 봤으면 좋겠네.”
상담할 수 있을만한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변호사? 왠지 내가 너무 비참해지는 기분이다.
대기업 회사원? 자기 코가 석자다.
학원강사? 이 시간에 전화나 받을까?
1류?... 이질감이 너무 강해.
8류... 알 수 없는 거리감.
쉼표 없는 인간? 내가 사표를 제출해야 할 사람한테 상담을 하는 건 미친 짓 같다.
“아... 진짜 미치겠네.”
혼잣말을 하며 담배를 꺼내 문다.
“또 세상 구하세요?”
14류다.
“형이 고민이 많다.”
나는 여과 없이 나의 상태를 말한다.
“무슨 고민이요?”
14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나나 우유에 꽂힌 빨대를 힘주어 빨며 물었다.
‘이건... 무슨 6살짜리 애 같은 모습이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누가 나한테 동업 제안을 했는데 말이다.”
“어떤 일이요?”
사악한 놈이다. 마침표가 찍히면 바로 질문이다.
“추심.”
“추심이요?”
“그래.”
“지금 하는 일하고 같은 일이네요?”
“그래.”
“그리고, 동업이면 사장님이 되는 거구요.”
“뭐... 부사장 정도 되겠지?”
“하기 싫은 추심은 거절할 수도 있구요.”
“수입이 충분하다면야.”
“어려운 사람은 무료로 추심해도 되구요.”
“뭐?”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돈은 땅 파면 나오냐?”
“지금보다 조금 힘들어질 수도 있겠죠.”
“월세는? 보험금은? 아니, 최소한의 삶의 질은 유지해야 하는 거 아냐? 자기 사업한다고 그런 것들이 다 될 것 같냐?”
“그래도...”
14류는 뭔가 머뭇거리다가 말을 계속한다.
“형... 제가 형보다 나이도 어리고 사회 경력도 짧아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요...”
“말해. 괜찮아.”
내가 너무 답답하다.
“형은... 언제까지 남의 꿈을 대신 꿔 주실 거예요?”
“뭐?”
“지금 회사 사장님 꿈이 뭔지는 저도 잘 몰라요. 국내에서 제일 큰 추심회사가 꿈인지, 돈을 가장 잘 버는 사람이 꿈인지, 아니면 추심이라는 업무 자체를 좀 더 고급스러운 업무로 끌어올리고 싶은 게 꿈인지 저는 몰라요. 그런데 확실한 건 제 꿈은 아니라는 거예요. 설령 사장님 꿈 하고 제 꿈하고 완전히 똑같다고 해도, 저는 그저 사장님의 꿈을 이뤄주는 하나의 자원일 뿐이잖아요.”
나는 14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한 변호사와 함께 저녁을 먹을 때였다. 나는 가장 친한 친구의 합격을 마음껏 축하해 주지 못했고 변호사는 자신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과를 마음대로 자랑하지 못했다.
“이제 뭐 할 거냐?”
나는 아무런 의미도 담지 않은 질문을 변호사에게 던졌다.
“글쎄... 연수원 나와서 바로 로펌에 들어갈까 생각 중이야.”
“임용은?”
“아직은 잘 모르겠어. 내 성격상 검찰은 좀 아닌 것 같고, 법원은... 잘 모르겠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할 정도의 위인인지.”
“그럼 지금 판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뭐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람들이냐?”
“아니...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좀 부담스러워서.”
“뭐... 그렇지. 펌에 들어간 다음에는 뭐 하려고?”
“일단 일 좀 배우고, 돈도 좀 모아야지. 그리고 1,2년 버틸 정도로 돈이 모이면 뜻 맞는 사람들하고 합동사무실이라도 차려볼까 싶다.”
“로펌을 그만두고?”
“응.”
“왜? 그래도 나름 보장된 인생일 텐데...”
“어차피 내 꿈 갈아서 세운 보호막일 텐데... 인생에서 꿈 빼면 욕심 말고 뭐가 남겠냐? 욕심 많은 사람보다 꿈을 좇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는 마땅히 답을 찾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변호사가 말을 계속한다.
“합동사무실 말이야... 거기에 네 자리도 있다.”
나는 가만히 있다가 답했다.
“뭐, 사무장이라도 시켜 주려고?”
“늦깎이 변호사면 어떻고 사무장이면 어떻냐? 그래도 우리는 친구고 같은 꿈을 꾸는 동지인데.”
“쳇! 굶기지는 말아라.”
변호사는 나를 보며 씩 웃으며 말했었다.
“조금 배고파도 괜찮아. 그래도 나는, 스스로의 인생에 감동받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는 미소 지으며 14류의 어깨를 툭 쳤다.
누가 봐도 오래된 건물이다. 흑갈색의 새시와 붉은색 벽돌이 오래된 느낌을 더욱 부각시킨다. 2층 창문에 붉은 글씨로 적혀 있던 ‘추심’이라는 두 글자는 지워지고 이를 대신해서 따듯한 느낌을 주는 노란색 계통의 글씨가 채워지고 있다.
“오래 기다렸냐?”
6류가 담배를 입에 문 채 나에게 다가오며 말한다.
“아뇨. 방금 왔어요.”
나는 답배갑에 남은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인 후 6류를 바라보며 묻는다.
“잘... 되겠죠?”
6류가 새로운 글씨가 새겨지고 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답한다.
“모르지. 그래도 해 보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참 멋지지 않냐?”
나도 새로운 글씨가 새겨지고 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렇죠. 어차피 한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면 되니까요.”
“그래.”
6류와 나는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창문을 바라본다.
“둘이서 함께 하니까 덜 아프고, 더 빨리 일어설 수 있을 거예요.”
갑자기 6류가 나를 바라보면 말한다.
“문제가 하나 있는데... 뭐... 딱히 문제는 아니고, 어젯밤에 정해진 거라 미처 말을 못 했는데...”
무슨 말이길래 평상시의 6류답지 않게 말을 질질 끌까 싶다.
“3명에서 같이 한다. 수익은 1/3이 될 거고.”
나에게 조금 더 빨리 언질을 주지 않은 부분이 살짝 아쉽기는 했지만 상관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 그렇군요. 잘 아시는 분이세요?”
“잘 알지는 못하고. 그런데 너도 아는 사람이야. 이제 곧 올 거야.”
“원래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인가 보네요? 그런데 저기 창문에 쓰여 있는 글씨... ‘행복’이에요?”
나는 윤곽이 거의 드러난 창문 위에 글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6류가 씩 웃으며 말한다.
“응. ‘행복추심’ 우리 회사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형식상 대표는 나니까 내 마음대로 정했다. 뭐라 하진 말아라.”
‘네이밍 센스하고는... 행복추심이 뭐냐, 행복추심이... 겁나게 촌스럽네.’
6류가 마음대로 회사 이름을 정한 것에 대해서는 불만 하나 없었다. 하지만... 행복추심이라니... 어려운 채무자들에게 행복을 되돌려준다는 의미인 것 같긴 하지만 확실히 촌스럽다.
“와! 우리 회사예요? ‘행복추심’! 이름 끝내주는데요!”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14류가 입을 떡 벌린 채 다가오고 있다.
6류가 말한다.
“이렇게 셋이서 시작하는 거다.”
사무실 내부가 정리될 때까지 근처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14류는 휴대전화로 무언가를 계속 찾아보고 있고, 6류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짧은 낮잠을 즐기고 있다.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학원 강사의 메시지가 온다. 4명이 모두 모여 있는 단체방이다.
‘지금 학원에서 애들 과자 돌리기 내기하고 퀴즈 풀기로 했는데, 답 아는 사람 있으면 빨리 알려줘라. 한 달 용돈 거덜 나게 생겼다. 곰돌이 푸가 닭 위에 올라타면?’
‘갑질’
대기업 회사원의 답이다.
‘폭행죄?’
변호사가 답한다.
나는 피식 웃으며 메시지를 입력한다.
‘푸라이드치킨. 이런 언스마트한 녀석들하고 친구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짧은 공백.
‘너 같이 스마트한 녀석하고 친구라는 사실 덕분에 나의 용돈이 굳어졌다.’
‘잘났다. 똑똑해서. 밑에 직원들이 자리를 비워서 미처 정답을 못 찾았다. 원래 문제는 함께 푸는 거야.’
‘법을 공부했으면 법적 사고력을 가지고 문제를 풀어야지, 왜 갑자기 요식업이냐?’
학원 강사는 잘 살아갈 것이다. 아이들은 좋은 교육을 받고, 특별히 아프지 않게 늙어 가면서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피해 휴양지를 다니면 살 것이다. 대기업 회사원도 잘 살아 갈 것이다. 우리들은 알고 있는 녀석 만의 힘과 근성, 그리고 가족들의 응원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 진 채로 잘 살아갈 것이다. 변호사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에서 크게 성공하고 한국에서도 계속 성공할 것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남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아 갈 것이다.
‘그래. 내가 너희들보다는 부족해도, 나는 나만의 가치를 찾아가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거다. 너희들이 응원해 줄 거라 믿는다.’
전화벨 소리에 6류가 눈을 뜨고 뭐라고 짧게 통화한다.
“이제 올라가자.”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새로운 사무실로 향한다.
사무실 앞에서 6류가 나에게 담배를 한 대 건넨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말한다.
“이제 끊으려구요.”
“응? 방금 전까지 폈잖아?”
“이제 힘든 사람들 도와야 하는데 건강해야죠.”
6류가 웃으며 담배를 다시 넣으며 말한다.
“그래! 건강하자!”
불안감, 흥분감, 그리고 근거 하나 찾을 수 없는 자신감.
14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속으로 외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이제 정말로 날아오를 때가 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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